수로 바라본 자유와 도(道) / 전병덕 

 

 

비가 내린다. 거센 장대비다. 예보에도 없던 장대비가 줄기차게 쏟아져 내린다. 그렇게 비는 저물녘 한 시간 가까이 마구 퍼부어 내렸다.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는 왼쪽 문암산과 오른쪽 응봉 등성이가 빗줄기와 내려앉은 운무 사이로 웅크린 짐승의 실루엣처럼 뿌옇다. 하늘의 선율인 양 어스름 속 빗방울 소리는 영혼을 흔들고, 나는 그 짜릿하게 아름다운 빗소리를 들으며 행복한 추억 속으로 잠겨 들었다.

 

아주 색다른 여행이었다. 지난여름 고등학교 때 단짝이었던 친구와 계룡산 일원에서 2박 3일을 함께 보냈다. 학교를 졸업하고 숙식을 같이하기는 처음으로, 약관의 청년이 정년퇴직을 하고 환갑을 지나 어느덧 반백의 머리였다. 그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여행은 어떤 변화의 추구보다는 단순한 익숙함에서의 가벼운 일탈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경험한 일련의 슬럼프에 대한 배려가 어느 만큼 깔려있는 듯 했다.

 

지하철에서의 느낌이 대구와 사뭇 다른데 먼저 놀랐다. 대전역에서 지하철로 갈아타고 현충원역까지 가는 동안 사람들의 얼굴은 한마디로 온화하고 평온하며 부드러웠다. 대구 사람들의 무표정하고 저돌적이며 경직된 인상과 너무 판이하여 이국땅에 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자 대전의 옛 이름이 한밭으로,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력이 크다고 한다.

 

친구는 먼저 현충원으로 차를 몰았다. 대통령 묘역에서 최규하 전 대통령의 묘소에 참배를 하고, 그는 자신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런 곳 구경이나 하겠느냐며 빙긋이 웃는다. 맞는 말이다. 내가 언제 일부러 현충원에 들를 일은 없지 않겠는가. 옛 전우의 무덤을 둘러보고 난 후 친구는 장군 묘역에 자신의 묘도 지정되어 있다는 자랑을 했는데, 왠지 그 자랑이 자랑처럼 들리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퇴직 후 취미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탤런트 기질이 부족한 면도 있겠으나 기실 이렇다 할 취미가 없는 것은 친구가 별로 없다는 사실과 또한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친구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강했다. 하여 어느 비 오는 날을 시점으로 ‘혼자 막걸리를 마시며 생각을 찾아가는’ 주색(酒索)으로 취미를 정하게 된다.

 

친구는 색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그가 이등병으로 시작하여 장군으로 예편을 했다거나 현재 대학교수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다거나, 교회의 장로라거나 정년퇴직 후 다시 교류를 시작한 친구라서가 아니다. 절제된 군인 정신의 독실한 신앙인이기보다는 그의 삶 속을 관류하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독자적인 자유 의지 때문이다.

 

늦은 점심 식사 후 동학사 계곡에 발을 담갔다. 스쳐가는 바람 소리, 물소리, 울려 퍼지는 산새 울음소리에 잠시 계룡산 도인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친구가 3사관학교 동기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임관 후 전방에서 사고로 두 눈을 잃었는데, 환갑이 지난 지금도 20대 초반 소위의 시선에 모든 사고가 고정되어 있다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 사고도 멈추어 버린다는 조금은 아이러니한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와 일본 문화의 차이를 들었는데, 우리나라는 기독교의 신앙은 받아들였지만 문화는 받아들이지 못했고, 일본은 문화는 받아들였지만 신앙은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이야기에서 시야가 확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낯설다. 고등학교 때 절친이기는 하지만 환갑을 지나서 그것도 타향에서 같이 잠자리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어색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친구가 술을 하지 않는 이유도 어쩌면 한몫 했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소나무 숲 그늘에서 맨손체조를 하는데 웬 벌이 한 마리 나타났다. 대수롭지 않게 “야! 저리 가. 어르신 운동하는데 방해하지 말고.”했는데, 웬걸 갑자기 세 마리로 숫자가 더 늘어났다. ‘아차, 얘들이 바로 말벌이구나.’하고 급히 돌아섰는데 돌연 오른쪽 팔뚝이 뜨끔하며 통증이 전해져 왔다.

 

생각이 많아 졌다. 언젠가 벌초하다가 말벌에 쏘여 사망했다는 뉴스를 시작으로 바로 병원에 가야하나 어쩌나하는 불안과 오늘이 일요일이라서 약국도 병원도 갈 수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사실은 수요일이었다), 어찔어찔 현기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샤워를 하고 살펴보니 벌써 벌겋게 부어올랐다. 친구에게 내가 이상하면 바로 119 부르라는 말을 하며 웃어 보였으나 사실은 불안감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가운데 계룡산 산행을 결정했다. 관음봉까지 해발 816m의 거리는 점점 더 굵어지는 빗방울과 드센 골바람, 조악한 돌길의 미끄러움 등으로 중간중간 망설임을 가져왔다. 그때마다 가위바위보로 결정을 했는데 매번 이긴 나의 결정으로 결국 정상을 밟았다. 하기야 혼자 산행을 하는 여성도 두엇 있기는 했다. 운무 가득한 관음봉에서 능선과 계곡을 내려다보며 계룡산에 소나무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신기하게 받아들였다.

 

느직한 오후 유성으로 갔다. 친구의 말을 빌자면 유성에서도 오직 오리지널 온천물이라는 곳에서 두어 시간 몸을 담갔다. 냉온탕을 오가는 카타르시스보다는 서로의 몸을 바라보며 아직은 근육질이라는 데 방점을 찍었다. 저녁 식사 때 혼자만의 반주를 즐기며 새삼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친구는 니체의 “생각은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누구라도 혼자 있을 때는 성자가 되고 자유인이 된다는 말을 했다.

 

다음날 아침 조치원역에서 여행이 마무리되었다. 원래 친구의 세종시 예비군 안보 교육 일정에 맞춰진 여행이었다. 안보 교육으로, 대학 교수로, 신학 강연으로 그는 현역 때보다 훨씬 더 바쁘고 자족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간헐적으로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작별의 말을 건넸다. 효도 관광 잘 받고 간다고, 계룡산 산신령님 봉침 세례 뜻깊게 받아들였다고.

 

열차 안이다. 차창 밖으로 2박 3일 동안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와 함께하는 동안 내가 지출한 돈은 단지 오가는 차비가 전부였다. 친구란 하루 열 번 만나도 경제력 있는 사람이 돈을 써야 된다는 그의 자유론에 나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 이런저런 대화를 곱씹어 보아도 그의 여유와 포용에 비해 나는 자만과 아집에 머물러 있음이 분명하다.

 

왕건길 전망대다. 팔공산 정상 비로봉을 바라보며, 굽이굽이 이어진 산릉과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다시 도(道)와 자유에 대한 사색에 잠겨 본다. 그렇다. 일상이 도이자 자유라면 시간 맞춰 잠자고 때맞춰 일어나는 것이 바로 도와 자유의 시작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누구나 찌뿌둥하거나 뚱한 낯빛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애써 맑고 가뿐한 표정으로 육신에 대한 예의인 운동을 하고, 주거에 대한 예의로 청소를 하고, 밥에 대한 예의로 설거지를 하고, 작음을 지향하며 쫓기는 마음을 내려놓는다면 영혼의 자유인, 도에 한걸음 다가서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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