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브 리그(STOVE LEAGUR) / 김윤신

 

 

 

 

현관을 드나들 때마다 앞마당을 훑어보는 게 요즘 내 버릇이다. 지팡이만 꽂아도 뿌리를 내린다는 이때쯤이면 더욱 그렇다. 바람에라도 날아든 색다른 홀씨가 없는지, 오늘도 앞마당을 한 바퀴 휘 둘러보지만 별다른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뿌린 것 없이 결실만 바라는 내 엉큼한 속셈에 앞마당은 콧방귀만 뀌고 있다. 그런데 오늘, 무심코 돌아서려는 내 발목을 확 휘어잡는 게 있었다. 긴가민가 돋아나는 작은 새순들, 누렇게 변한 푹 더미 속에서 이제 막 눈을 떠 꼬물거리며 피어나는 연한 이파리들, 분명 물질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지난여름에 뒷마당에 있던 풀꽃 두어 포기를 휑한 앞마당에 옮겨 심었다. 빈 땅만 보이면 파고드는 잔디에게 맞불을 놓기 위해서다. 별꽃 모양의 작은 보라색 꽃인데 꽤 앙등맞다. 게다가 그들의 다부진 생존력이란 덩굴손의 발빠른 행보는 날이 다르게 영역을 넓혀 나가며, 생김과는 달리 다른 꽃들을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는 뻔뻔스러움조차 지니고 있어 마치 초여름의 정원은 제 것이라는 듯, 단숨에 화단을 점령하는 작은 맹수 같은 것이었다. 그런 놈을 단지 앞마당으로 이사시켰을 뿐이었다. 초여름의 왕성한 기운까지 빌었던 터라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며칠 새 그토록 기가 꺾일 줄이야. 특유의 왕성한 기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시름시름 잔병치레 하는 노인네마냥 누을 자리만 찾더니 바싹 말라 누런 가지들만 실타래를 이루어 그만 죽어버렸다. 앞마당의 토질 또한 뒷마당의 그것과 다를 게 없었건만, 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생명을 거둔 죄책감에 눈도 마주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도 그들이 제일 먼저 일어나 파릇파릇 손짓을 하는 게 아닌가.

“나야 나, 이렇게 튼튼하게 돌아왔어. 내가 일어서는 걸 봐.”

풀꽃은 그렇게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이태 전에 친구가 체리 묘목 한 그루를 주었다. 젖내도 가시지 않은 애기나무였다. 망설이는 내게 길러보면 재미있을 거라는 그녀의 격려를 믿고 나는 그것을 마당 한 모퉁이에 심었다. 마침 맞은편에 또 다른 체리나무가 있으니 둘이 동무 삼으면 될 터, 나무도 쌍을 이뤄 심으면 좋다고 하니 무럭무럭 자라라고 덕담을 했다.

그런데 의외로 묘목의 성장이 더뎠다. 오는 동안 차멀미가 심했나, 아니면 낯을 가리나, 비료도 뿌려주고, 좋은 흙을 사다 덮어주며 기웃거려도 어찌된 셈인지 좀체 자라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묘목을 준 이에게 도움을 청하니 뿌리를 내리는 중이니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하기야, 어린 게 가족 떠난 설움이 오죽할까 싶기도 했다.

낯설고 물 선 객지생활이 누군들 만만할까마는 눈 뜨면 모락모락 피어나는 내 이민생활에 대한 좌절감도 좀체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 바람에 내 촉수는 늘 고국을 향해 있었고 그 때문에 남편과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갔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곳을 뜨지 못했고, 어영부영 집을 사고 텃밭을 가꾸면서 시나브로 살아가는 사이, 어느 덧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었나 보다.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다는 불평을 지금껏 이어지고 있지만 그 아시에 낯선 지인들의 차이를 읽는 밝은 눈을 갖게 됐으며, 이곳이나 고국이나 사람 사는 세상살이는 별 다르지 않다는 것도 함께 눈치 챘다. 새로운 삶에 적응하느라 걸린 풀꽃의 한 철에 비하면 내 긴 시간이 참 부끄럽다.

프로선수의 세계에 스토브 리그하는 말이 있다. 한 해 동안의 결실을 난로 곁에서 평가한다는 말인데 이를 테면 새해의 연봉을 결정하는 시기라는 뜻이다. 한 해 동안 흘린 땀과 연봉은 비례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때이지만 선수들에겐 가장 잔혹한 시기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생명 있는 어느 것인들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땀이 없을까. 그러고 보면 휴식기라 할 수 있는 겨울만큼 자신의 근력을 키우기 좋은 계절이 또 있을까 싶다. 풀꽃이 겨울 한 철 근력을 키워 다시 태어나듯 체리 묘목에게도 지난겨울이 강한 근력을 키운 시간들이 됐으면 좋겠다. 지난겨울 동안 키운 내공으로 풀꽃이 얼마만큼의 기세를 뻗어나갈지 올여름의 성장이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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