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여행 / 박양근

 

 

인생은 여행이다. 그중에서 작가들은 보통 사람과 다른 특별한 여행을 한다. 몸속에 원초적인 노마드의 피가 흐르고 있어 늘 언제나 떠나고 싶어한다. 무언가 새로운 환경을 원할 때, 무심코 흘린 말이 절박한 고백임을 깨달을 때, 좌절하고 실연당하여 자신이 사라졌음을 직감할 때 떠난다. 최초의 여행 작가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이가 왜 싸우러 가고 바다를 표류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모든 여행의 아이콘을 만들었다. 그 후 세계의 모든 작가는 글이 끝나면 떠나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다시 글을 쓰는 정신적 순환의 이유를 찾았다.

 

몸의 작가를 만든다. 몸이 자유롭지 않으면 정신이 지혜로울 수 없다. 작가는 늘 안일한 가정, 야만의 사회, 폭주하는 역사에 묶인 몸을 해방하려 한다. 안락한 호텔과 푸른 지중해 해변은 편안한 휴식처가 될지 모르나 좋은 여행지는 아니다. 황톳빛 구부러진 시골길, 무너진 성벽 위에 뜬 달, 갈대가 일렁이는 외진 곳, 성화 모자이크가 그려진 시골 성당, 올리브 나무 밑의 찰랑거리는 이슬람 연못을 만날 때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왔구나 하는 눈물을 흘린다. 이런 곳이 글쓰기를 부르는 영감의 장소가 된다. 이런 먼 곳에 다다르면 비로소 깊숙이 숨어있던 나를 발견한다.

 

작가가 되려면 늘 '홀로됨'을 찾아야 한다. 작가란 언어를 대하는 독신자다. 영혼의 싱글이 되는 순간은 교향곡의 서곡과 화폭에 갈겨지는 유화의 첫 붓 자국과 같다. 그리고 죽음의 방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처럼 비통 서럽기도 하다. 과거를 죽여야 다시 살아나니까, 작가란 그런 것이다.

 

작가적 신원은 어디서 성숙하는가. 문학이라는 좁은 문을 지날 때다. 여행 작가는 감각을 되살려주는 상황을 항상 찾아야 한다. 비 내리는 들판이 축축하고 바닷가 모래가 부드럽다는 지식만으로 부족하다. 직접 맨몸으로 빗줄기를 맞이하고 모래를 손바닥에 얹어 바람에 날려보아야 한다. 젖은 들판과 까끌까끌한 모래밭에 몸을 눕히는 행위가 자신을 만나는 의식이다. 폭력과 수탈과 기만에 허덕이는 인간을 사랑하고, 그들의 상처 난 영혼을 위로하려는 여행을 원한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 그런 발품과 마음이 감동의 작품을 낳는다. 보들레르는 "예술가는 산책하며 사람과 세상을 관찰하는 방관자"라고 하였다. 그렇지않는가, 작가란 어디를 가든, 어디에 정착하든 늘 나그네다.

 

그렇게 하려면 어떡해야 하는가. "무조건 쓰자"라는 내적 부름에 충실할 것이다. 사과와 귤을 사면 한두 개의 덜 익은 과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일단 작가라는 의식을 가지면 생활오수가 넘쳐나는 시궁창에서도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땀 내음을 맡을 수 있다. 그런 곳으로 펜과 노트를 들고 떠나면, 그렇고 그런 개천이 아름다운 글의 강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작가는 여행하더라도 글쓰기 욕망을 잃어버리면 "내가 왜 여기에 왔지?"라는 공허감에 빠진다. 그것만큼 작가에게 위험한 여행이 없다.

 

"풍경과 인상"의 상관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풍경이 객관적이라면 인상은 주관적이다. 주변에 널린 사물과 경치가 어느 순간 추억과 꿈이 어울린 풍경으로 바뀌는 것을 제임스 조이스는 현현(懸懸)이라 하였다.

 

작가로서 떠났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일행이 있을 때다. 여행을 떠날 때 "나 혼자 밥 먹을 수 있어."라고 자신한다면 홀로 떠날 수 있다. 일행이 있을 때는 투덜대기보다 버티는 인내가 필요하다. 시선을 외부로 돌려 새로운 눈 먹잇감을 찾고 그럴 수가 없다면 하다못해 가까운 공원으로 나가 어슬렁거릴 것이다. 작가란 쉬어도 길에서 쉬고, 잠을 자도 길에서 자는 족속이다. 오래전부터 많은 작가들이 가정 사회 교회 국가를 감성과 이성을 마비시키는 감옥으로 간주하였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거나 "니 어디 그렇게 싸돌아다니노"라는 말에 기죽지 말라. 그것들은 그대 작가를 얽어매려는 교활한 거짓말이며 사기에 불과하다.

 

세상은 읽어야 할 책이고 인생은 그곳을 여행하는 것이다. 낯선 도시를 찾아갔을 때 그곳의 우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면 관광일 뿐이다. 순간순간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본전을 건진다. 작가에게 가장 큰 진실은 공짜로 쓸 수 있는 글은 없다는 점이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 난장판 세상에서도 끝까지 지켜오는 순수한 영혼. 맑은 한 방울 사유와 희디흰 명주실처럼 이어지는 사색. 무엇보다 청년기의 무뢰한 허영에서 벗어난 장년의 완숙한 상상. 그런 것이 어울린 고뇌가 글 꽃을 피운다.

 

무엇보다 명예라는 화려한 비석과 공명이라는 높은 아치를 멀리하라. 그것들은 상인들과 정치가들이 바라는 싸구려 명패에 불과하다. 작가로서 무언가 원하려면 차라리 후세 사람들이 찾아오는 조그만 묘비를 택하라.

 

그곳이야말로 작가 그대가 찾아야 할 최종 여행의 성지다. 작가의 무덤은 진정한 독자와 만나는 밀회의 장소이며 비석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문집이다. 필자가 미국의 문화도시인 콩코드 인근에 있는 슬리피 홀로우라는 공동묘지에 갔을 때 문인 구역에서 찾아낸 호손의 묘비는 높이가 20㎝를 겨우 넘는 조그만 돌비석에 불과하였다. 작가의 책과 무덤과 비석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진정한 작가란 살아서는 아무도 그리지 못한 삶의 지도를 만들고 죽어서는 고독하지 않은 무덤에 묻히는 자이다.

 

그런 곳은 어떤 곳인가. 답은 하나다. 또 다른 "나를 부르는 숲"이다. 그리고 나를 부르는 숲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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