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 최장순 

 

배수터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른들이 양동이 가득 물고기를 들고 나온 장면을 목격한 터라 호기심은 그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저수지 수로를 따라 들어갔다. 빛을 모두 잠근 배수갑문은 두려움만 흘려보내고 무릎까지 무서움이 찰랑거렸다. 천정에 매달린 박쥐들을 보는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평소와 다른 물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보이는 눈은 따로 있는 것처럼 주변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슥한 곳이 아늑한 곳인지, 갑문 주변으로 호흡을 뻐끔거리는 물고기들이 까맣게 모여 있었다.

돌아 나오는 길이 문제였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마법에 걸린 듯 발걸음이 물속에서 얼어붙었다. 들고 간 괭이와 작대기로 터널 벽을 쾅쾅 쳤다. 큰소리로 노래도 불렀다. 노랫소리는 약간의 두려움을 떼어냈지만 출구에서 들어오는 한줄 빛을 만나고서야 스르륵 우리의 목덜미는 풀려났다. 느닷없는 빛에 놀랐는지 양동이 속이 분주했다.

동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컴컴한 방은 두려움이다. 동심에서 비롯한 모험은 밝음 너머의 어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어둠은 깜깜하거나 컴컴하거나 어둑한 검정. 검정은 상반된 두 얼굴을 지녔다. 신비와 고귀와 위엄을 표정 짓다가도 어느새 암흑과 죽음의 표정으로 돌아선다. '침묵하는 색채이자 죽음과동의어'라는 카딘스키의 주장을 따라가면, '가장 기본적인 색, 가장 무난한 색, 가장 멋진 색'이 블랙이다. 검은 정장은 미팅장소로, 결혼식장으로, 상갓집으로 출입하는데 무리가 없다. 넥타이, 액세서리, 가방의 색깔에 따라 어느 곳이든 통하는 색깔이다.

검정은 진실의 아이콘이다. 비행기 블랙박스가 오렌지색이나 노란색임에도 '블랙'으로 불리는 것은 내장된 비밀이 바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경사스러운 날, 합죽선에 쓴 경구나 좋은 문장은 마음을 담은 진지한 정성이다. 한지에 먹물로 쓴 글씨는 어떤 색깔보다 신뢰도를 높인다. 그것을 인정한다는 듯 붉은 낙관을 꾹, 눌러주지 않는가. 글이나 그림의 세련된 검정, 먹의 번짐과 농담濃淡에 따라 동양적 운치를 더해준다.

"지미 추의 구두에 발을 넣는 순간, 너는 이미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주도한 색은 블랙이다. 편집장 메릴 스트립이 입은 검은 드레스, 비서 앤 해서웨이의 검은 원피스는 보수적 권위와 발랄한 섹시함의 대비였다. 훤칠한 키와 흰색 피부에 어울리는 검정패션은 도회적 매력을 발산했다. ​빨간 립스틱은매혹적인 패션의 마침표였다. 명품의 가치를맛보면 마약처럼 절대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악마의 유혹에 영혼을 판 것이나 같다고 했다. 악마는 블랙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졌다.

​흑자黑子와 적자赤子. 흑자는 검정의 최상급 표현이다. 법복이나 수녀 복장이 컬러풀하다면 경건함과는 멀어진다. 고가의 세단, 연미복, 연주자의 상의는 예외 없이 중후한 검정이다. 패션의 완성 또한 검정이다. 화려함을 후순위로 슬쩍 밀면서도 결코 우아함과 중후함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백색식품은 부의 상징이었다. 쌀과 밀가루와 설탕의 삼백三白은 사정이 넉넉한 집에서나 먹었다. 잡곡밥은 끼니 해결에 만족했던 서민의 주식이었다. 흰밥을 원 없이 먹고 싶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블랙 푸드가 대세다. 건강에 이롭다는 입소문에 식탁은 흑풍을 몰고 왔다. 백미보다는 현미와 흑미를, 정제한 백분보다는 거친 호밀을, 백당은 되도록 줄이자는 캠페인에 동조하고 있지 않은가.

검정은 지루하고 단조롭다. 또한 우울하다. 블랙홀처럼 가치를 빨아들인다. 위세 등등한 검은 정치학은 만인의 눈을 가리고 다양한 판단을 흡수해 버린다. 위협과 공포의 상징이었던 파시스트의 검은 셔츠단이나 일본의 극우파들은 획일화된 맹목적 애국주의를 검정으로 포장했다. 속내를 은폐하는 검정, 위장술에 능한 검정. 비선秘線이 조직을 움직이고 전횡과 농단을 일삼는 것도 검은 권력의 생리이다. 곳곳에 설치된 CCTV는 검은 눈이다. 드리워진 감시의 그림자. 하지만 그것 없이는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이율배반이다.

썩어가는 것들은 검다. 부패한 고기, 시궁창, 벌레 먹은 치아. 중세 유럽인구의 절반을 앗아간 페스트에 흑사병이라는 딱지를 붙인 것도 죽음을 검정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장례식에서 살아있는 이들은 블랙리본을 달고 죽은 이들을 애도한다. 빛을 잡아먹은 폐가는 불길한 검정을 키운다. 흑심을 품은 밤은 인간의 범죄성을 악화시킨다. 밤이면 더욱 굳게 문을 닫아거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검정의 도전적인 카리스마 내면엔 두려움이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내약외강內弱外强, 블랙리스트도 어쩌면 두려워서 경계심의 일종으로 보호막을 치는 것이 아닐까.

순혈주의, 하얀 색에 익숙한 우리 정서에 검정은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검정은 희망이다. 태초의 색깔 검정에서 역사는 창조 되었다. 어둠을 젖힌 해가 둥글 떠오르고, 어둠속에서 생명이 태어난다. 불에 탄 나무가 숯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검정은 더 이상 슬픈 색이 아니다. 칠흑 같은 터널을 벗어나면 어느새 빛이 보인다. 탄부의 검은 얼굴에서 하얀 웃음을 발견하듯 어둠이 있기에 밝음의 소중함을 알고, 어둠이 있었기에 현재가 밝은 것이다. 잠시 우울하다고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색의 부재不在를 원점에서 시작하는 색, 모든 부정否定을 덮어버리는 마법이 블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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