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을 지나치다 / 박양근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3월 중순이 되면 한 달간 교생실습을 나갔다. 가정 형편상 가정교사 노릇을 쉬지 않았고 야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 덕분에 교생실습이 별로 힘들지 않았다. 교생을 시작한 무렵에는 학교 울타리를 따라 개나리꽃이 늘어섰지만 마칠 무렵인 4월 중순의 교정 담벼락에는 담쟁이가 작은 새잎을 달고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나도 내년이면 저런 모습으로 살아가는구나 생각하니 결연해지면서도 핏빛 청춘이 다 지나가는가 싶었다.

시범수업을 마치고 수료하는 전날이었다. 우리를 지도했던 선생님들이 회식을 베풀어 준다고 했다. 연배를 따지면 지도교사들은 학과의 대선배들이고 교단의 선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사범부속고등학교의 영어교사라면 짱짱한 실력파로 소문이 자자한 분들이다. 하교할 무렵 알 들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성이식이니 한 명도 빠지지 말라고 엄명하셨다.

해가 질 무렵 약속된 동네로 모였다. 당시 삼덕동에는 한옥이 많았다.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니 고색창연한 기와집이 떡 가로막고 있었다. 육중한 대문 좌우로 기와를 얹은 돌담장이 이어졌고 담 너머로 올라온 파초는 큰 키를 자랑했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잘 손질된 널찍한 화단은 갖가지 화초들로 풍성하고 담벼락을 따라 서너 그루의 찔레가 이른 꽃을 피우고 있었다.

노란 장판이 반짝거리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진수성찬이 차려진 수라상 네 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빨갛고 파란 방석이 빙 둘러 깔려있었다. 말로만 듣던 방석집이었다. 당시 대구에는 한복 입은 아가씨들이 일일이 술시중을 드는 요정 같은 방석집이 많아 잘나가는 사람들이 단골로 들르곤 하였다. 선배 교사님들이 후배를 위하여 큰 턱을 낸 것이다. 선배와 우리들은 건달들마냥 결연식을 거행하듯 마주 앉았다.

잠시 후 울긋불긋한 한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진한 화장내가 방안에 가득 찼다. 아가씨들을 남자 사이에 빠짐없이 앉힌 주임선생님은 "제군들은 오늘부터…​."로 시작하는 장엄한 격려사를 했다. 마담의 공손한 인사가 있은 다음 아가씨들이 술잔을 채웠다. 그때 마신 술은 막걸리였는데 최고참 선배가 좋아하는 술이 막걸리였다. 모두가 거나해질 때까지 한동안 술잔이 돌고 돌더니 유행가에 맞춰 젓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는 니나노판이 벌어졌다. 교육 선후배의 단결식답게 <섬마을 선생님>을 합창하고 <하숙생>도 불렀다. 내 맞은편에 앉은 아가씨는 백난아의 <찔레꽃>을 간드러지면서 처연하게 불러 좌중을 단박에 녹였다. 왠지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하얗고 갸름한 얼굴과 정원에 핀 찔레꽃이 겹쳐왔다. 흥이 고조된 선배 선생님들은 드디어 아가씨들과 엉켜 블루스를 추었는데 내 눈에는 모두 프로급이었다. 교단에 설망정 모름지기 풍류잡이여야 한다는 시범에 감복하면서도 새까만 후배인 우리들은 정신 나간 짓은 하지 않았다.

<찔레꽃>을 부른 아가씨는 내게만 술을 자꾸 권했다. 잔을 채울 때마다 연분홍 저고리 사이로 봉실한 젖가슴이 찬연하게 드러났고 잔을 채우느라 스친 오른손은 솔방울을 태울 때의 화기만큼 뜨거웠다. 교정에서 보는 여대생들의 얄팍한 가슴과 뻣뻣한 손은 견줄 바가 아니었다. 입에서 뿜어진 달콤한 술기가 건너와 내 얼굴을 더욱 붉혔지만 고조된 분위기에 묻혀 천만다행이었다.

잠시 후, 최고참 선배의 지시에 따라 아가씨들이 원하는 대로 자리를 바꾸었다. 그 아가씨가 슬몃 내 옆에 앉았다. 싫지 않았다. 성인식이 언제 시작되는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 가운데 친구들은 하나둘 나가떨어졌다. 꼿꼿한 내 자세를 지켜보던 선배들이 "절마, 제법이야." 하며 내게 술을 더 따르라고 했다. 그때 그녀의 도톰한 손이 뭔가를 내 손에 슬며시 쥐어주었다. 돌아본 그녀의 귀밑 하얀 솜털이 찔레꽃 수술마냥 백열등에 반짝거렸다. 화장실에 가는 척 밖으로 나와 펴보니 "연락하세요. 김초연"이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하얀 쪽지였다.

교생실습 기간이 끝나고 대학교정의 마지막 봄은 무르익어갔다. 일주일이 지나도 그런 쪽지를 받았다는 친구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성인식 대상으로 뽑혔단 말인가. 그럴수록 전화를 할지 말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죽어도 비밀로 서로 지켜줄 동지 친구들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마침내 전화를 걸었다. 마담인 듯한 여인이 받아 그녀를 바꾸어 주었다. 전화를 받는 동안 다른 아가씨들의 수다와 웃음이 수화기에 고스란히 들려왔다. 다음 주 토요일 저녁에 오라는 전갈이었다.

그녀는 작은 술상이 차려진 뒷방으로 나를 안내하면서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괜히 왔다 싶엇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시간이 적잖게 지날 동안 두 번이나 돌아온 그녀는 손님들이 가지 않는다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마다 가까이 다가온 얼굴은 더운데 손은 뜻밖에 서늘했다. 술판에 지친 표정이 뚜렷했고 화장으로 가린 나이는 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였다. 그런 경우에 순종 풋내기였던 나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마침내 먼 방에서 들려오던 술꾼들이 떠나면서 집안이 잠잠해졌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아가씨가 와서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바람맞았다는 그런 모욕감을 느끼며 빠져나오는 마당에는 찔레꽃만 허연 꽃 더미를 내밀고 있었다.

일주일 후, 금요일 오전 수업을 마칠 무렵 그녀가 불시에 학교로 찾아왔다. 어떻게 강의실을 찾았는지 알 수 없었고, 양장한 차림이라 못 알아볼 뻔했다. 내가 간 날은 술에 절어 도저히 만날 수 없었다는 말을 전하러 왔다고 했다. 금요일 오후여서 반가우면서 불편하기도 했다. 아무튼 선배님들이 자주 가는 방석집 아가씨이니 그냥 보낼 수가 없어 대학생들이 데이트하러 자주 가는 동촌과 동화사를 구경시켜 주기로 했다. 동촌 강변에는 토끼풀이 무성하게 번져있었고 동화사로 가는 계곡에는 하얀 찔레꽃이 덩굴째 피어있었다. 그녀는 길가 찔레꽃을 따면서 나지막하게 <찔레꽃>을 불렀다. 방석집에서는 중모리 가락이었지만 그때는 두견새의 울음처럼 처량하면서 느린 진양조였다. 돌아오는 시외버스 칸에서 잠시 잡아준 손은 계곡바람을 내내 받은 탓인지 가늘게 떨렸다. 그 하루의 햇살도 평일처럼 기울면서 그녀와 헤어졌다.

한 달이 지난 6월 초였다. 한 학기가 파할 무렵 문득 궁금해져 전화를 했지만 그녀는 일주일 전에 떠났다 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했다.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들이 때 너무 냉랭하게 대한 것일까. 상대가 연하의 대학생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일까, 숙맥은 별 볼 일 없다고 여겼을까. 그렇더라도 왜, 어디로 갔을까. "남쪽나라 내 고향​…" 이라는 가사를 유난스럽게 크게 부르더니 남해 섬 어디로 갔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학창 시절의 마지막 봄 추억을 잊고 지냈다. 그런데 예순을 넘기면서 봄날이면 찔레꽃이 괜히 눈에 박히기 시작했다. 덩달아 그 아가씨가 쪽지를 건넨 까닭도 궁금해졌다. 키 크고 잘생긴 동기도 많았는데​…. 요즈음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 곱상했던 나에게 이웃집 누나의 정을 주려 했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술집에 다닌들 '대학생 의동생'을 갖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꿈인가. 왜 그런 기쁨을 가질 수 없단 말인가.

1970년대 모든 젊은이들에게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그 눈빛을 이제야 읽는 아둔함을 죄스러워한다. 무심코 지나친 들꽃 한 송이도 섭섭할 텐데, 사람이 견딜 아픔은 어찌 전자계산기로 셈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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