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기 많은 달 / 구활  

 

 

 

달은 바람기가 많다. '휘영청'이란 낱말만 봐도 달이 감추고 있는 속뜻을 알만하다. '휘영청'이란 달의 수식어는 무엇을 갈구하는 여인네의 낭창낭창한 가녀린 허리 곡선을 연상시킨다. '휘영하다'는 말은 뭔가 허전하다는 뜻이다. 허전하여 무엇을 갈구하는 마음은 반드시 만족하도록 채워주어야 한다. 그 허전함을 채우는 방법은 이성의 따뜻한 손길 밖에 없다.

해는 양이고 달은 음이다. 둘 다 누드인 채로 우주 공간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해는 강한 빛을 쏘아 어느 누구도 바로 쳐다보지 못하도록 살짝 맨몸을 가리고 있지만 달은 자신의 육체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물속에서 발가벗고 목욕하고 있는 달을 보고 '물은 알몸의 달을 숨겨주려고 물결을 이루며 혼란스럽게 아롱거리고' 라는 시가 있다. 달은 누가 보든 간에 자신을 받아주는 곳이면 그곳이 계곡이든, 호수든, 술잔이든, 눈동자 속이든 무한 질주를 감행한다. 그건 순전히 타고난 달의 바람기 탓이다.

달은 몸을 숨겨주려는 사소한 것들의 호의가 싫어 아예 자신의 이마에 물결무늬 자국을 지니고 달빛을 따라 길을 떠난다. 그래서 달은 음력 칠월과 팔월 보름인 백중과 추석 때 자신을 가리려 떼거리로 몰려오는 먹구름은 치를 떨어가며 증오한다. 달은 자신의 누드를 때론 화려하게, 더러는 우수에 젖은 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이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 오르는 추억이 되게 한다.

바람기의 속성은 변하는 것이다. 바람이 한 곳에 머물 수 없듯 바람기 또한 무엇 하나에 집착하지 못한다. 예쁜 여자가 바람이 나면 수많은 사내가 패가망신하게 된다. 그러나 바람기 많은 달이 보름달에서 반달이 되고 다시 초승달과 그믐달로 바뀌면 시가 둥지를 틀고 문학이 깃을 치게 한다.

달을 노래하면서 보름달의 '휘영청'에 너무 집착하면 안 된다. '동산 위에 뜬 둥근달'이나 '낮에 나온 반달' 보다도 '아침에 잃어버린 화장대 위의 속눈썹이 초저녁 하늘에 걸려 있는 초승달'로 노래를 바꿔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소설가 나도향은 <나는 그믐달을 사랑한다>는 산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말이 나온 김에 내 나름의 풍류학을 풀어내 보자. 풍류의 삼대 요소는 시주색詩酒色이며 풍월수風月水는 배경이다.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길 요량으로 자리를 잡으면 붓을 들고 시를 짓고 술이 한잔 거나해지면 기생들이 풍악을 울린다. 그런 자리는 대체로 물가의 정자이거나 바람이 이는 강 주변에 달이 떠 있는 곳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문인 묵객들이 짓고 그린 수많은 글과 그림 속에는 시주색 풍월수詩酒色 風月水가 빠진 적이 없다. 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이란 시에서는 달과 술 그리고 그림자가 한데 어우러져 멋진 풍류를 연출하고 있다.

 

'꽃나무 사이에서 한 병의 술을/ 홀로 따르네 아무도 없이/ 잔 들고 밝은 달을 맞으니/ 그림자와 나와 달이 셋이 되었네/ 달은 술 마실 줄을 모르고/ 그림자는 나를 따르기만 하네/'

 

또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이란 그림은 등 뒤의 기와집에서 밤새도록 뜨거운 정을 나눈 남녀가 초승달이 뜬 새벽녘에 이별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兩人心事兩人知)'는 제발과 주례 격으로 떠 있는 실눈 같은 초승달이 그림의 격을 한결 높여준다.

서해 여행을 하다가 새만금을 지나 부안의 나비펜션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테라스에 간단한 주안상을 차렸다. 외박하고 들어온 누이처럼 퉁퉁 부은 음력 열이튿날 달이 얼굴을 내밀고 "흥이 제법이네." 하고 한마디 거들었다. 그날 밤 달은 수묵과 같은 구름을 시녀처럼 거느리고 있었지만 술판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구름 자락에 휘감기는 법이 없었다. 술이 떨어지자 시 한 수로 빈 흥취를 메울 수밖에 없었다. 

 

'테이블의 손님이 일어설 줄 모르므로/ 젊은 여주인은 달 위에 올라앉아 미끄럼을 탄다.'

-김종태 시인의 <하현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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