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의 숨은 그림 찾기 / 정재순


 

 

  이름 모를 새 소리가 산중의 적막을 깨운다. 사찰의 처마 끝 풍경소리처럼 청아해 마음이 씻기는 것 같다. 소백산 기슭에 자리 잡은 산문을 들어선다. 예천 용문사는 고려 때 두운선사가 암자를 지으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사천왕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떡 버티고 섰다. 여느 절집과 달리 용문사는 회전문이라 부른다. 중생들에게 윤회의 전생을 깨우치게 하려는 마음의 문이라는 의미가 깃들었다고 한다.

  회전문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니 고답(高踏)적인 분위기가 물씬한 대장전이 정좌하고 있다. 국보급 보물을 여럿 품은 대장전은 아담하지만 볼수록 예스런 기품이 우러난다. 비바람을 맞아 퇴색된 단청과 세월의 무게를 떠받치느라 살이 튼 굵은 기둥은 대장전이 상서로운 곳임을 말없이 웅변한다.

  대장전 바깥 언저리에 시선이 간다. 몇 발짝 떼는데 처마도리에 착 달라붙은 물고기가 눈을 빠끔 뜨고 쳐다본다. 맞배지붕의 왼쪽 뺄목에 귀면이 송곳니를 드러내 무서운 눈초리로 부라린다. 바로 아래 연꽃 봉오리와 연잎이, 서편에 봉황이 자리한다. 오른쪽 창방에는 용이 물고기를 앙 문 채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여의주 머금은 청룡이 목을 쭉 빼고 동쪽을 주시한다. 저들은 어째서 기이한 표정으로 사방을 살피는 것일까.

  옷깃을 여미며 대장전 안으로 든다. 목불 삼존좌상과 후불탱이 엄숙한 금빛을 발한다. 세상을 밝히려는가. 대추나무를 이어 붙여 조각한 아미타여래 본존불은 반달 모양의 장식을 머리에 달고 사바세계를 아우른다. 사각 후불탱에 둥글둥글한 구름무늬 광선이, 불과 부살상 사이로 새하얀 굵은 선이 이채롭다. 가장자리에 범자(梵字), 만자(卍字), 팔괘(八卦)를 새겨놓아 위엄에 화려를 더한다. 주위가 온통 금빛으로 물든다.

  불단을 중심으로 양쪽에 팔각 정자처럼 생긴 윤장대가 한 좌씩 놓였다. 상부의 정교하게 짜인 무수한 조각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몸체 난간은 연잎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으며, 여덟 개의 문 무늬는 음양을 이룬다. 오른쪽 윤장대의 빗살무늬와 격자무늬는 단아한 분위기를 풍긴다. 왼편에는 연꽃 문양을 투각한 꽃살 향기가 그윽하다. 숨결을 '후~' 하고 불어넣으면 금세 살아날 것만 같다. 연꽃 사이로 헤엄치는 물고기와 꽃잎이 열리는 순간의 묘사가 생생하기 그지없다. 

  윤장대 하대는 팽이처럼 뾰족하다. 상부의 빗살무늬 창살 안에 경전이 봉안되어 있다. 마루 밑과 천장이 회전축으로 이어진 윤장대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 불경 만 권을 읽은 것과 같다고 한다. 그 공덕의 힘으로 번뇌가 소멸되는가 하면 소원성취도 한단다. 그 시절에 먹고 살기 바쁜 하층민들은 글을 깨우칠 여유가 없었을 텐데 불경 한 줄 읽을 수 있었으랴. 이에 윤장대를 만들어 세상살이에 지친 중생들의 마음을 위무했으리라.

  전해지는 말에 신은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고, 이 세상의 만물도 요긴한 목적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평범한 돌덩어리에서 다비드의 이미지를 발견, 망치로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고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다비드 상을 완성했다. 내면의 생각과 마음속으로 그려낸 간절한 소망이 비로소 실제로 형상화 된다는 것이다. 즉, 마음에 뜻을 두고 지극정성을 다하면 이루어진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이 윤장대도 그런 긍정적인 효과로 실현의 열쇠를 거머쥐었을 터이다.

  삶이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어디에 어떠한 변고가 숨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무 그늘에서 한가하게 흐르는 물을 구경하다가도 느닷없이 물살이 거세져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빈손인가 했는데 말고삐를 잡는 처지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삼존불 위로 시선을 옮기는데, 기묘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 같기도 하고 용머리 같기도 한 형상은, 재를 뒤집어 쓴 것처럼 거뭇하면서도 눈에서 광채가 번뜩인다. 그 아래에는 비늘을 가진 동물이 양반 다리 모양으로 몸을 꼬고 있다. 정체가 뭘까. 자리로 보아 이무기가 오를 반열은 아닐 터이고, 바로 위에 있는 용의 몸체로 보인다. 묘한 분위기가 나를 압도한다. 불두 위의 용은 용문사의 내력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왼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빤히 내려다보는 눈과 딱 마주쳤다. 용이다. 고개를 바짝 들고 붉은 혀를 날름거린다. 뿐만이 아니다. 오른편에도 용 정수리에서 솟아오른 뿔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꿈틀대며 입을 쩍 벌린 용이 사각 모서리마다 눈을 치켜뜨고 두리번거린다. 두운선사가 이 가람을 지으려고 산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용이 나타나 영접했다고 한다. 그 후 왕건이 삼국 통일의 뜻을 품고 두운을 찾아 왔을 때는 지척을 분간 못할 정도로 운무가 자욱했는데,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했다는 것이다. 용문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대장전은 사방에 용이 나타난다. 이는 용문사를 지키는 동물은 용이라는 것을 전설한다.

  환한 삼존불 주변과 다르게 천정 구석은 어둑신하다. 숨어서 지켜보는 듯 윤장대 뒤 창방 위에 원숭이를 닮은 목조상이 물끄러미 앉았다. 부처님 가까이에 오두방정 떠는 원숭이라니. 순간, 전등사 대웅전 네 귀퉁이에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다는 원숭이 이야기가 스쳐간다. 서유기에서 원숭이는 잔꾀를 부리는 인간을 상징한다. 여기서는 등으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데, 혹시 타락한 인간을 잡아다가 벌을 세우는 것이 아닐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서늘하다.

부처님 둘레에 상상의 동물인 용과 봉황 그리고 현실의 동물인 원숭이를 닮은 형상이 있다. 좌청룡, 우백호, 주작, 현무는 동양의 방위철학에서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방신이다. 사방신은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형이상의 짐승이 아니던가. 대장전이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는 깨달음의 우주라고 볼 때, 용이 사방을 지켰기에 아직도 화마 한 번 들지 않았나 싶다.

  우물천정에 그득한 열다섯 조각그림은 가히 환상적이다. 상상의 세계에 나올 법한 진기한 날짐승들이 뭉게구름의 끝자락을 잡고, 긴 꼬리를 이리저리 휘날리며 천상을 날고 있다. 돌고 도는 인생, 윤회를 통해 지상의 업장이 소멸하고 더 내려놓을 것 없이 가벼워지면 나 또한 저 새들처럼 천상을 훨훨 날아다니지 않으랴. 한 생의 번뇌를 내려놓기도 이리 어려운데, 그 길은 얼마나 까마득할까. 문득, 자세히 눈여겨보아야 뜨이는 이곳의 그림들처럼 우리네 인생도 숨은그림찾기가 아닐까, 라는 생각에 미친다.

  다시 한 번 내부를 찬찬이 둘러본다. 용은 스물여덟 개의 별과 소통하며 부처님의 세계를 보호하고 있다. 불국정토를 구현하려는 부처님의 깊은 뜻을 모자란 중생이 다 헤아릴 순 없겠지만, 대장전의 가장 낮은 곳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천정을 올려다보며 숨은 그림을 찾다보니 조금은 알겠다. 진리와 깨달음은 삶의 주변에 수두룩하나 스스로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밖으로 나와 멀찌감치 서서 대장전을 바라본다. 지붕 위에서 뽀얀 연꽃 네 봉오리가 동그마니 나를 내려다보며 무엇을 찾았느냐고 묻는 듯하다. 숨은 그림은 육안으로 찾았으나 심안이 밝지 않아 오롯한 의미는 찾아내지 못했다. 마음을 좀 더 닦고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회전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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