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수에 관하여 / 가드너

 

 

 

만일 세상에 비난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는 습관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악수의 습관이다. 그러나 이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습관도 방금 심리(審理)에 걸린 모양이다. 신문 지상에 이에 대하여 위생적인 이유에서 엄중한 고발이 나왔고, 우리들은 우리가 만나고 헤어질 때에 상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좀 위생적인 방법을 채택하도록 종용받고 있는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의 이 뿌리깊은 습관을 버리게 하자면, 상당히 가혹한 법령과 중한 벌칙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평생 한번도 악수하지 않고서 지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마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수하지 않고 그럭저럭 지내는 모양이다. 일본인은 머리를 숙이고, 인도 사람은 작별할 때 친구의 가슴에 손가락 끝을 댄다.

이러한 인사법과 비교해보면, 우리 서양의 서로 손을 쥐는 습관은 아마 품위 없고 촌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남녀 구별 없이 키스를 하는 우리들의 습관이 일본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추잡한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그들에게 있어서 키스란 우리들이 거기에 관련짓지도 않는 순전한 성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키스 문제에 있어서, 우리들은 우리 조상보다도 훨씬 자제하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에라스무스가 그의 서간에서, 류더 왕조 시대의 영국에서 얼마나 키스가 관습화했던가, 그리고 또한 은연중에 저 박학하고 고덕한 인사(에라스무스 자신)가 얼마나 키스를 즐겼는가를 서술한 유명한 대목을 누구나 읽었을 것이다. 그가 오늘날의 우리들에 대해선 그렇게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키스가 결코 우리들의 일상적인 인사법이 아니었던 관계가 하나 있다. 남자끼리의 키스 같은 것은 순 대륙적인 습관이고 주로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길러진 것이다. 내가 목격한 것 중에서 가장 대대적인 키스의 성연은 크로포트킨 공(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지리학자)의 저택 공은 당시 브라이튼에 살고 있었다 에서다. 그의 생일날이었다. 수염을 기른 고령의 러시아 승정(僧正)들이 축하 인사를 드리기 위하여 열을 지어 들어왔다. 하나 하나 들어올 때는 그들은 이 현자에게 달려들어 그 목을 껴안고 수염에 덮인 두 뺨에 소리가 울릴 정도의 키스를 퍼붓는 것이었고, 크로포스킨도 역시 소리가 울릴 정도의 키스로써 이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우리들의 엄격한 취미에서 생각하면, 열정의 도가 좀 지나친 것이다. 나는 영국인들이 매수당해서 서로 키스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언젠가는 설복되어, 서로 악수하는 것을 그만두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인사할 때 거기 수반하여 손잡는 맛이 없다면, 그것은 일격을 가하는 기분, 혹은 신성 모독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그것은 날인이 없는 증서 같을 것이고 계모의 숨결처럼 찰 것이고, 서명까지도 타이프로 찍은 편지처럼 공식적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손으로 하여금 그 본연의 임무를 못 하게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손은 반감을 살 것이고, 유리 주머니 속이나 등 뒤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단추를 만지작거리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손을 쇠사슬로 묶어두어야 할 것이다. 손이 동기간의 손에 뛰어덤비는 충동은 본능이고 격렬한 것이다.

물론 이 습관에는 불리한 점도 있다. 암만해도 잡고 싶지 않은 손, 미지근하고 끈적거리는 손, 맥없고 시들부들한 손, 뼈만 있는 억센 손들이 있는 것을 우리는 다 아는 바이다. 뷰라이야 힙(디킨즈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나오는 교활한 인물)이 우리의 동심(童心)을 벅차게 한 그 무서움과 염오의 정은 다른 어떤 사정보다도 그의 손의 감촉으로 전달된 것이었다. 그것은 차고 축축한 손이어서 추잡하고 소름끼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그 손을 쥐어본 것처럼 그 손의 감촉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손을 만질 때마다 굽신굽신하는 비굴한 인물의 모습이 마음에 떠올라와, 그 손의 임자를 당장 저주하게 된다. 당치 않은 말인지 몰라도, 악수가 육체적·정신적 건강 상태를 아는데 그리 나쁘진 않은 단서가 될 수 있다. '저 손에는 죽음이 있다' 고 한 것은, 키츠와 헤어진 후에 콜리지가 한 말인데, 우리들에게도 이에 못지않은 확신을 가지고, 저 손에는 부정(不淨)이나, 부정직(不正直)이나, 혹은 솔직이나 용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어떤 인격은 악수 속에 녹아들어오는 것같이 생각된다. 악수는 너무 표현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써 인격에 대한 것이 완전히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출판업자인 피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손을 내민 채 다가와서, 그 손을 무슨 내버리고 싶은 물건처럼 우리들 손에 놓은다. 그것은 일기 여하(日氣如何)에 따라, 혹은 찬 푸딩과 같은 손이고, 혹은 더운 푸딩과 같은 손인데, 그러나 차건 덥건 푸딩과 같은 점에선 다름이 없다. 우리는 그 손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그것은 분명히 피커의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야 그가 그렇게까지 그것을 버리고 싶어 애쓰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손을 잡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해파리처럼 아무런 감응이 없고, 아무도 해파리하고 열렬히 악수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악수는 서로 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악수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예의상 부득이한 동안만 쥐고 있다가 살며시 그것을 피커에게 돌려보낸다. 그러면 그는 다른 누군가에, 말하자면 자기 손에서 그것을 가져가도록 하기 위아여 떠난다.

그 다음, 그와 정반대의 극단적인 것이 원기 좋은 스터빙즈의 경우인데 그는.

 

너에게 톰이나 잭이라고 말을 걸면서,

등허리를 툭 침으로써

너를 얼마나 존경하는가를 나타낸다.

 

이런 유의 사나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등을 툭 치지는 않는다. 그는 우리의 손을 잡는다 어리석게도 손을 그에게 주기만 한다면 아프고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쥐고서 어깨에서 거의 빠질 정도로 팔을 흔들어댄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이 내 인격입니다. 내게 미지근한 점은 조금도 없습니다. 철저한 요크셔인입니다. 대쪽같이 곶지요. (, 아프다.) 뵈서 반갑습니다. (다시 한 번 꽉 비튼다) 그에게서 반환됐을 때의 손의 아픔이란 눌려 으스러진 것 같다. 그래서 작별할 때엔 두번 다시 손을 그에게 주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그런가 하면 부들부들하고 머뭇거리는 손이 있다. 이것은 지나치게 애정이 차서 언제 손을 떼야 할지를 모르고 창 밖으로 집어팽개치고 싶어질 때까지 상대방 손바닥에 놓여 있다. 그러나 비록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손, 몸부림치게 하는 손이 있긴 하지만, 이 악수의 의례는 우리들이 때때로 벌금을 지불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동양인의 의례적인 악수례(握手禮)와 러시아인의 거창한 포옹과의 중간적인 온건한 중용을 취한 것으로서 아라비아인의 손끝을 가슴에 대는 예, 그것은 일종의 축도와 같은 것인데, 그것만큼 위엄은 없다 하더라도, 따뜻한 맛과 인간적인 우애 정신을 더욱 지닌 것이다.

우리는 모든 시인 중에서 가장 우정이 두터운 한 시인(다음에 인용되는 시구 Auid Lang Syne의 작자 로버트 번즈)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을 집어치우기 전에 충분한 의학적인 증거가 필요한 것이다.

 

내 믿는 친구여, 그대에게 이 손을 드리나니

그대도 그대의 손을 주라.

 


 

가드너(Gardiner, Alfred George). 영국의 수필가.저널리스트. 그의 수필은 경묘하면서도 치밀하고 위트에 넘친 것이 그 특징이다. <모자 철학><우산 도적>등은 명수필의 전형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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