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기쁨 / 헤르만 헤세

 

 

 

오늘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기쁨도 없고 멋없는 덤덤함 속에 살아가고 있다. 섬세한 사람들은 틀에 박힌 삶의 형태를 답답하고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일상에서 물러나 있다. 사실주의의 짧은 시기가 지난 후, 예술과 문학세계 도처에서 불만족이 드러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징후로서 르네상스와 신낭만주의에 대한 향수를 들 수 있다.

교회는 "그대들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외치고, 아베리우스는 "그대들은 예술이 없다"고 외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우리에겐 기쁨이 없다. 고양된 삶의 감흥, 즉 삶을 축제처럼 기쁜 일로 파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르네상스가 그토록 우리의 마음을 끄는 이유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분()이나 초()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즉 조급해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기쁨의 가장 위험한 적이다.

지난 세기의 목가적인 글과 감상적인 여행기를 읽을 때 우리는 동경 어린 미소를 짓는다. 무엇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여유가 없었단 말인가? 나는 산책하면서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목동을 노래한 시를 읽었을 때, "만약 우리 시대의 일을 그들이 해야 된다면, 그들은 얼마나 한숨을 쉴까!"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생생활에서 조급해하는 것은 슬프게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받은 교육의 해로운 영향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의 삶의 이런 조급함은 오래 전에 우리의 얼마 남지 않는 여유마저도 빼앗아 갔다. 우리의 즐기는 태도 역시 일할 때만큼이나 신경이 날카롭고 또 긴장되어 있다. "가능한 한 많이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가 구호가 되었다. 그것으로 인해 더욱 더 많은 만족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기쁨은 점점 더 적어진다.

소도시나 대도시에서의 큰 축제 또는 현대 도시의 유흥지를 한 번 둘러 본 사람은 눈동자는 생기가 없고,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일그러진 얼굴 모습에 대해 고통스럽고 역겨운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족할 줄 모르면서도 끝없이 신물 나도록 즐기는 병적인 향유의 태도는 극장에서나 오페라하우스나 콘서트홀이나 화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대의 예술전시회를 찾아다니며 즐거움을 얻기는 드물다.

부자 역시 이러한 불행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 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최근 사정에 밝아야 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조류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폐단을 막는 일반적인 처방을 다른 사람 보다 잘 모른다. 단지 유감스럽게도 아주 비현대적인 낡은 처방을 한번 생각해 본다. 그 것은 평범한 즐거움이 두 배의 기쁨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작은 기쁨을 지나쳐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절제가 요점이다. 어떤 모임에서 연극이나 오페라의 초연을 볼 기회를 놓쳤다고 말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보다 더 큰 모임에서는 신간이 나온 지 몇 주가 지나도 아직 그 책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아주 일상적인 모임에서는 오늘 신문을 읽지 않았다고 말하면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용기를 가진 것을 후회하지 않는 몇 몇 사람들을 알고 있다. 사람은 이 주일에 한번만 그 표를 사용하면 뭔가 잃는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래도 그는 뭔가를 얻는다고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림을 한꺼번에 많이 보는데 익숙해 있는 사람은 할 수만 있다면 한 시간이나 그 이상 어떤 한 걸작품 앞에 머무르고, 그 것으로 그 날은 만족하도록 노력해 보길 바란다. 그는 그 때도 뭔가를 얻을 것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이런 식으로 시도해 보기를 바란다. 몇 번쯤은 뭔가 새로운 것에 대해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화가 날 것이다. 그는 몇 번쯤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스스로 미소 지으며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그 밖의 다른 어떤 절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10시에 잠자리에 드는 습관을 가져보길 바란다. 그는 약간의 시간과 즐거움의 상실이 얼마나 훌륭히 보상되는 가에 놀랄 것이다.

절제의 습관은 "작은 기쁨"을 즐길 수 있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런 능력은, 원래 모든 인간에게 타고난 것으로 현대의 일상생활에서 여러모로 위축되고 사라져버린 것, 즉 어느 정도의 명랑성과 사랑과 시적 감정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 작은 기쁨은 수없이 일상생활 속에 묻혀 드러나지 않아, 많은 노동자들의 무딘 감각이 이를 쉽게 느끼지 못한다. 작은 기쁨은 눈에 띄지 않고 칭송되지 않고 돈도 안 든다! (이상하게도 가난한 사람들도 가장 아름다운 기쁨에는 돈도 들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런 기쁨들 가운데 매일 매일 자연과의 만남이 주는 기쁨이 가장 크다. 무엇보다도 많이 오용된 우리 눈, 즉 현대인의 지나치게 긴장된 눈은 원하기만 한다면 아주 고갈되지 않는 향락을 누릴 능력을 지니고 있다. 내가 아침에 일하러 갈 때면 매일 수 없이 다른 노동자들이 방금 잠에서 깨어 침대에서 빠져 나와 한기를 느끼며 나와 같은 방향이든 반대방향이든 빠르게 거리를 건너곤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빨리 걷고 눈을 길 위나 고작해야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과 얼굴에만 고정시킨다.

친구들이여, 고개를 들기 바란다! 적어도 나무나 하늘 한 조각을 한번 쳐다보도록 시도해 보길 바란다. 꼭 푸른 하늘일 필요는 없다. 어떻든 태양 빛을 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아침 한 순간이라도 하늘을 쳐다보는데 습관을 들이면 어느 새 그대들 주위에 공기를, 잠과 일 사이에 그대들에게 허락된 상쾌한 아침 공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매 하루하루가, 또 모든 지붕이 그 나름대로의 모양과 특별한 빛깔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 날 내내 상쾌함과 약간의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의 여운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점차 눈은 저절로 많은 작은 매력들, 즉 자연풍경과 길거리를 음미하고, 작은 삶의 무한한 웃음거리를 알게 하는 중재자가 될 것이다. 거기서부터 예술적으로 훈련된 시각까지 이르는 길은 이미 절반에 이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시작이며 눈을 크게 뜨는 것이다.

한 조각의 하늘, 푸른 가지가 늘어진 정원 담장, 쓸만한 말, 멋있는 개,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 예쁜 여인의 머리 - 이 모든 것들이 주는 즐거움을 그냥 빼앗겨서는 안 된다. 처음으로 작은 기쁨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은 그가 걷고 있는 거리가 끝나기도 전에, 채 일분도 안돼서, 아주 귀중한 것들을 볼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는 것은 결코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을 주고 신선함을 준다. 눈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사물은 흥미 없고 추한 면이라도 관조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보려고 해야만 한다.

보는 것에서 유쾌함과 사랑과 시적 감정이 나온다. 일하는 동안 가까이 보기 위해서 작은 꽃을 한번 꺾어 본 사람은 삶의 즐거움을 찾는데 있어서 한 걸음 진보를 한 셈이다.

내가 오랫동안 일을 했던 집 건너편에 여학교가 있었다. 대략 열 살 되는 아이들의 교실이 이쪽 편에 놀이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일을 해야했다. 그래서 그 때마다 놀고 있는 아이들의 소음 때문에 피해를 보았지만, 이 놀이터로 한번 시선을 준 것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기쁨과 삶의 즐거움을 주었는지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형형색색의 옷들, 활기차고 기꺼워하는 눈들, 날씬하고 힘찬 동작들은 내 안에 삶의 즐거움을 한껏 높여 주었다. 승마학교나 양계장도 아마 그와 비슷한 즐거움을 줄 것이다. 단색의 평면에, 그러니까 집의 벽면에 비춰진 빛의 작용을 한번 잘 관찰해 본 사람은, 눈이 얼마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즐거움을 느끼고 즐거움을 수용하는지를 알 것이다.

이 정도의 예로 충분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들에게는 틀림없이 벌써 더 많은 다른 작은 기쁨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꽃이나 어떤 과일의 냄새를 맡거나, 자기나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어린아이들의 대화를 귀담아 듣는 특별히 황홀한 기쁨들 말이다. 벌들의 윙윙대는 소리나 어떤 멜로디의 휘파람 소리도 여기에 속하며, 그 밖의 수천의 자질구레한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 사소한 것들로 만든 작은 즐거움의 해맑은 고리로 인생을 엮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매일 매일을 그런 작은 기쁨으로 살아가고, 더 크고 힘든 즐거움은 휴가나 좋은 시간에 즐기도록 아껴 두라는 것이, 바로 내가 시간부족과 불만족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권고하고 싶은 말이다. 휴식과 매일 매일의 긴장이완과 해방감을 얻기 위해 큰 것이 아닌 작음 기쁨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헤르만 헤세(1877-1962) 독일의 소설가 싯다르타’ ‘데미안’ ‘지와 사랑’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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