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지옥 속의 낭만 / 천경자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가끔 산술 시험을 보다가 종이 쳐서 어앙 울음을 터뜨리다 꿈에서 깨는 일이 있었다.

나는 소학교 다닐 때부터 수학엔 흥미라곤 느껴보지 못했으니까, 수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의 두뇌는 우수한 편이 못된다.

내가 소학교를 다닐 때나 여학교에 들어갈 무렵엔 어쨌든 간에 낭만시대였다. 그 시절에도 과외 공부가 있었다.

방과 후에, 상급학교에 갈 남녀 10여 명이 남아 한자리에 모여서 6학년 담임선생 지도 아래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공부를 했다. 물론, 돈은 내지 않고 공짜 과외 공부를 했었다. 어떤 때는 선생님도 봉사에 지쳤는지 아직도 햇살이 서창에 반사하여 눈이 부시는데,

해가 졌으니 어서 돌아가.”했다.

요즈음 아이들보다 약삭빠르지는 못했지만, 숙성했던 그 무렵의 우리는 벌써 내외 같은 걸 한다고 여자아이들끼리 몰려서 귀가길을 걸었다.

1937년 이른 봄, 지금의 전남여고에 시험을 치렀다.

내 수험번호는 128번이었다. 유독 번호를 잊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일어(日語) 시험 문제지가 석 장인데 내 책상 위엔 잘못으로 두 장밖에 놓여 있지 않았었다. 나 역시 모르고 두 장만 쓰고 나와 버렸으니 야단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시절엔 구술시험(면접)과 체능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구술시험은 세 군데 시험장을 거치게 되는데 지리, 역사, 자연, 수신(도덕) 등으로 나와 있었다.

2실인 자연실에 들어갔을 때다. 시험관 선생 앞 테이블에는 까치의 박제, 겉보리가 담긴 놋그릇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까치를 가리키며 뭐냐고 물었다.

까치입니다.”

어디서 사느냐고 물었다.

저 가지에 앉았다가 이 가지에도 앉습니다.”

하고 무의식중에 제스처를 쓰며 대답했다. 시험관 선생은 코를 벌름, 웃음을 참는 듯하더니,

그래서…….” 하고 또 묻는다.

 밭에 앉습니다.” 했다.

그 멋쟁이 생물 선생 때문에 나의 시적(詩的)인 우답(愚答)은 생각지 못했던 득점을 했던 것 같다. 입학한 후에도 나는 그 선생에게서 귀여움을 받았고, 선생님의 모습을 스케치해서 바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세상도 무던히 변했거니와 모든 면이 삭막하기 짝이 없고 되레 복잡하기만 하다. 나는 생리적으로 현대식 과외 공부를 찬성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 아이만 안 시키는 따위의 고집도 부릴 수는 없다. 과외 공부 근절이란 당초에 잘못된 구성의 그림에다 잘 그리려고 개칠만하는 격밖에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과외 공부는 그대로 계속되고 있고, 도리어 과외 공부 근절 운동에 편승한 색다른 부작용만 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현대란 참 모든 면이 비정하고 복잡하기만 한 세상이다.

어른이 되어서까지 시험 공포의 꿈을 꿀 만큼 옛날에도 시험 지옥은 있었다. 한 가지 다른 면은 여유가 있었고 정() 이 있었던 것이다.

  

천경자(1924-2015) 동양화가 수필집 유성(遊星)이 가는 곳’ ‘언덕 위의 양옥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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