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듯 찬 듯 / 최민자

 

 

 

5년 넘게 땅속에서 묵었을 매미 소리를 모카커피에 타서 마신다. 오늘 아침 내 특제 메뉴다. 매미 소리는 먹기 좋게, 적당히 분절되어 커피 잔에 녹아든다. 어떤 소리는 튜브에서 쥐어짜듯 찔끔찔끔 흘러나오고 어떤 소리는 톰방톰방 방울져 떨어진다. 짝에게 닿아야 할 노랫가락을 내 잔 속에 빠뜨렸으니 녀석들은 끝내 짝짓기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선율이 흘러나온다. 파가니니인지 텔레만인지, 얼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려나,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스쳐 가는 바람에 연연하지 않는 늙은 나무처럼 나도 이제 무엇을 오래 붙들지 않는다. 지나가는 것들을 지나가게 하고 흘러가는 것들은 흘러가게 놔둔다. 기억해 봤자 금세 잊고 말 터, 대지한한 소지간간(大知閑閑 小知間間, 큰 앎은 느긋하지만 작은 앎은 사소한 것을 따진다)이라고, 초연한 척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나이 들어가면서 열외로 하는 항목이 많아졌다. 새로 출시된 휴대폰의 기능도, 잘나가는 연예인 이름도, 헤드라인 뉴스도 관심 밖이다. 아침마다 눈을 환하게 하던 베란다의 풀꽃들도 몇몇은 이름을 알지 못한 채 시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읽지 않으면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던 날들도 있었는데 매일 몇 권씩 쏟아져 오는 책들이 개봉조차 못 한 채 책상 위에 쌓여 간다. 음악도 일상도 마음으로 깊이 스미지 않고 몸 밖을 스쳐 미끄러져 버린다. 어린 날의 시간은 마음 안쪽에 지워지지 않는 각인을 남기지만 나이 든 사람의 시간은 남루한 살가죽 위에나 고랑을 새기고 가는가.

기억하려 해도 기억나지 않고 욱여넣고 싶어도 욱여넣어지지 않는 것, 세월 탓이다. 시간은 끊임없이 서 있는 것들의 등을 떠밀고 멈추어 있는 것들을 흔들어 교란한다. 한자리에 오래 머무는 것도, 조용히 혼자 깊어지는 것도 용인할 수 없다는 듯이 막무가내로 흐르라 흘러가라 내친다. 광포하게 휩쓸려 드는 물살에 속수무책 떠밀려가면서도 애면글면 움켜잡은 몇 알갱이의 사금 부스러기조차 얄짤없이 털어 내 내려놓고 가라 한다. 만상이 다 흐름 위에 있으니 무엇을 움키고 지킬 수 있을까.

북촌 주택가에 머물던 시절, 골목을 오가던 노파들이 생각난다. 그 골목의 안노인들은 어찌 된 일인지 다들 조금씩 비슷하게 생겼다. 어깨가 굽고 다리가 벌어지고 머리카락이 파뿌리처럼 부스스했다. 옷 입은 품새도 엇비슷했다. 같은 골목의 야채장수에게 같은 푸성귀를 사 먹고 같은 목욕탕에서 때를 밀며 같은 사람 흉을 보다 보면 외양도 그렇게 비슷해 지는 건가. 굼뜬 걸음새로 골목을 바장이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쓸쓸해지곤 했다. 진즉 화학적 활성도가 떨어져 불가역적으로 경화되어 버린 구불텅한 시간의 껍데기 같은 육신들, 뒤틀리고 쪼그라진 삭신의 현주소는 '늙음'보다 '낡음'이 제격일 듯싶었다.

쓰름쓰름, 매미 소리가 바뀐다. 라디오의 음악도 바뀌어 있다. 시간과 흐름, 존재와 소외, 그런 것들에 닿아 있던 마음이 오대산 숲길에 잠들어 있던 늙은 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월정사 인근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그 나무는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속을 비워 오래 살았을까. 오래 살다 보니 절로 속이 비워졌을까. 스치고 스미며 저를 통과해 간 시간을 내려놓고 무심하게 널브러져 있던 나무, 이끼에 덮인 나무의 잠이 더없이 평안하고 고즈넉해 보였다. 더는 비울 게 없을 때까지 비우다 누워 버린 노거수老巨樹처럼 제 안의 소리들이 바닥날 때까지 여름 내내 울어 대는 매미들처럼, 갈피갈피 엉겨 붙은 기억과 욕망들을 모조리 내려놓고 반납해야만 이승으로부터의 탈주가 허용되는, 그것이 이 행성 안 목숨의 법칙이며 종결의 형식 아닐까.

베란다 통창 너머로 풀꽃들이 한들한들 나풀거린다. 늦은 봄에 사다 심은 꽃모종들이 하나둘 말라 죽어 버리고 곁방살이하던 잡초들만 제 세상인 듯 신나 있다. 후미진 귀퉁이 한 줌 흙을 빌려 한 시절 반짝 꽃피우고 살았으니 그다지 아쉬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다고, 하얗게 센 갓털 다 날려 보낸 민머리 민들레가 사운거린다. 활자는 눈에 들지 않아도 풀과 나무와 바람의 속말들은 더러 귀에 박히기도 하니 나이 드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어차피 털고 비워 가벼워지는 게 목숨이라면 저처럼 한껏 목을 빼고 부는 바람에 의탁해 허허실실 나부껴 보는 것도 방하放下의 방편으론 괜찮을 듯하다. 더는 열정에 복역하지 않고 속도에 편승하지 않고 스쳐 가는 바람처럼 뒹구는 낙엽처럼, 질주하는 풍경의 바깥에서 사부작사부작 뒤척거리며 낭만과객 흉내라도 내며 늙고 싶지만 그 또한 만만한 노릇은 아니다. 품생품사品生品死는 언감생심이라도 폼생폼사 역시 함부로 넘볼 경지는 아닐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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