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것들 / 박보라

 

 

“쉽게 쓰이는 건 부끄러운 거라고 했어요. 고민해봐요.”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는 말에 되돌아온 답이었다.

썼다 지운다. 썼다 지웠다. 몇 시간째 그러고 있다. 말을 이제 막 시작한 아이처럼, 글을 이제 막 쓰기 시작한 아이처럼 모든 게 낯설다. 글은 항상 낯설게 쓰라고 배웠는데 이렇게 낯설어도 되는지 모르겠고, 이런 낯섦이 계속되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세상을 만들고, 움직이게 하는 말과 글의 힘을 잘 알기에 한 자, 한 자에 무게를 느낀다. 재능은 그다음이다. 갑자기 글자를 박아 넣는 손이 자못 심각해진다.

과연 내가 쓰는 글을 글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글을 써도 되는 사람일까? 이 길은 내가 가도 되는 길일까? 끊임없이 질문하며 거울 속 나를 젖은 손으로 문질러본다. 하지만 자꾸자꾸 뿌얘지는 내 얼굴은 여전히 부끄러워 수증기 속으로 몸을 숨긴다. 답을 말해주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그 질문들은 뜨거운 공기에 불어 더욱 팽창해간다. 질문들은 점점 커지고, 나는 점점 작아진다.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문장에 괜한 느낌표를 찍는다. 궁금하지도 않은 문장에 괜한 물음표를 찍는다. 더 할 말도 없는 문장에 괜한 쉼표를 찍고, 아직 다하지 못한 문장에 괜한 마침표를 찍는다. 거짓투성이다. 이런 거짓 글은 누구의 눈도 사로잡을 수 없다. 누구의 마음에도 안착할 수 없다. 그래서 난 그 문장들을 다시 지운다. 생각이 잘려 나간다. 한숨이 저녁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진다.

부끄럽다는 말은 어디에 붙일 수 있는 걸까?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내 민낯이 드러날 때? 혹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세상 앞에 설 때? 하지만 난 그 반대를 생각한다. 꾸미지 않은 모습은 차라리 아름다운 것이다. 화장기 없는 순수한 소녀의 해맑은 민낯이 그러하고, 맨몸으로 세상에 나온 아기들이 그러하다. 오히려 꾸몄던 모습이 들켰을 때 부끄러운 것이다. 숨겼을 때 부끄러운 것이다. 내 안에 꾸몄던 것들, 숨겼던 것들. 하지만 글에서 그런 것들은 신기하게도 다 꺼풀이 벗겨지고 각질처럼 일어난다.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감출 수 없다고 하는데 난 거기에 ‘글’이란 단어를 추가해 넣는다.

글 속엔 글쓴이가 산다. 글쓴이의 생각과 삶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람은 순수한 글을 쓰고, 심각한 사람은 심각한 글을 쓴다. 그리고 진실한 사람은 진실한 글을 쓰고, 거짓된 사람은 거짓된 글을 쓴다. 일어나는 각질을 덮으려 두꺼운 화장을 덧칠하면 가면이 되는 것처럼 내 글이 아닌 글을 가면처럼 덧쓰면 글은 어떠한 힘도 가질 수 없는 그저 한낱 광대가 되어버리고 만다. 남의 생각과 삶을 흉내 내는 것일 뿐 정작 중요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정신이 까무룩해졌다. 그럼 난 이제 어쩌란 말인가? 어떻게 글을 써야 한단 말인가?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부르려면 이름이 필요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름은 누군가를, 무언가를 부를 수 있는 음성 언어다. 불릴 수 없는 것들은 모두 죽어가는 것들이다. 읽히지 않는 글들은 모두 죽어가는 것이다. 죽음이란 이름 앞에 처연히 서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을까? 죽어가는 내 글들을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죽어간다는 말이 주는 절망과 허무를 대체할 말은 없는 걸까? 또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이름도 이름이다. 가짜 같은 그것을 과연 불린다고 할 수 있을까? 커서는 이 모든 질문 뒤에서 내 답을 기다리며 눈을 껌뻑이고 서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반역〉이라는 작품을 본다. 화가는 프레임에 파이프 하나를 그려 넣고, 이건 파이프가 아니란다. 우리가 언어의 약속으로 파이프라 부를 뿐, 그림 속 그건 본질적으로 파이프가 아니란 뜻이다. 그래서 난 세상의 ‘아닌 것들’을 헤아려 봤다. 윤동주가 아닌 히라누마 도슈, 이보라가 아닌 박보라,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 작가가 아닌 나, 글이 아닌 나의 글. 그 밖에도 여러 개의 ‘아닌 것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본질적으로 본질이 아닌 것들. 그것들을 우리는‘그것들’이라는 이름으로조차 부를 수 있을까?

부끄럽지 않으려, 쉽게 쓰지 않으려는 나는 그마저도 부끄러워 오늘 밤도 책상 앞에 웅크려 앉았다. 글을 쓴다는 건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업이란 걸, 그래서 끊임없이 고민할밖에 없다는 걸 깨달아서다.

창밖에 잔바람이 분다. 별이 켜진다. 하지만 난 11월이면 떠오르는 어떤 시인처럼 아직도 괴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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