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길 / 홍윤선

 

가는 빗방울이 헝클어져 날린다. 베란다에 쌓아 놓은 가재도구도 기우뚱 불안하게 밖을 내다본다. 비가 제법 올 거라고 했는데 이 정도 같으면 움직일 만하다 싶어 운전석에 앉았다. 내비게이션이 평소와 다른 경로를 우선해 보여주지만 예사로 넘기고 평탄한 고속도로를 선택한다. 목적지를 향해 넓은 길에서 질주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아 서둘러 길을 나선다.

 

기숙사에 있던 큰아들이 휴학하는 바람에 급히 자취방을 구해야 한다. 와이퍼가 느릿느릿 움직이다 성가실 정도로 빨라지더니 빗물이 차창을 타고 흥건하게 흐른다. 차가 쉬지 않고 우는 것인지 욱여넣은 짐들의 아우성인지 누군가의 차오르는 마음인지 알 수 없다. 빗소리는 쉴새 없이 타닥거리고 물 장막에 비친 세상은 어슴푸레하다. 장대비에 기대어 언젠가처럼 홀로 울어도 좋은 날이다. 도로 전광판에 ‘빗길 미끄럼 주의, 감속 운행’ 글자가 깜빡거리고 정체 구간이 나타난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비상등을 켜고 황급하게 속도를 줄인다. 앞차 뒤차 큰 차 작은 차 할 것 없이 후미등에 불이 들어와 도로가 온통 적색이다. 저마다의 이유로 달려야 했던 이들이 여기서 머뭇거린다. 빨리 가지 못해 성난 사람인 양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이다. 어른어른 흘러내리는 풍경이 슬프기라도 하였을까, 불그름히 충혈된 눈망울 같기도 하다. 지금은 속내를 보이기 마뜩잖으니 눈감아 달라는 표정, 지나친 관심도 성마른 판단도 조심스럽다. 못 본 척 고개 돌려주기 위해 우리는 옆자리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승용차는 말할 것도 없고 기름을 실은 탱크로리가 앞서 있고 화물차와 대형버스도 천천히 지나갔다. 나는 컨테이너 운반차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란히 서행한다. 내 앉은키 높이 만큼이나 되는 열 개의 바퀴에 자칫하면 빨려들 것 같아 오싹하다. 길이 열려 있으면 추월을 하든 앞세우든 피했을 일인데 사방이 막혀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한번은 덤프트럭 같은 이가 차선을 무시하고 달려든 적 있었다. 오해를 풀려고 이쪽저쪽을 살피며 아무리 설명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전화 한 통이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일인데 귀를 닫은 운전자는 같은 말만 되풀이하였다. 상대가 가진 힘과 속도에 휘청거리다 망연자실했다. 접촉사고 직전까지 몰아붙이더니 뒤늦게 자기 실수를 알아채고 분기점이 나오자 부리나케 빠져나갔다. 맥이 탁 풀렸다. 비상등이라도 깜빡여주고 갔으면 덜 아팠을 것을. 두렵다 하여 길 한가운데 무턱대고 설 수 없으니 차선을 잘 지키고 가는 수밖에. 흔들리더라도 휘둘리지 않으려고 소형차 운전대를 힘주어 붙잡는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결국 나를 탓한다. 교통상황을 반영하여 내비게이션이 우회로를 보여주었을 텐데 과감하게 무시하는 배짱은 이럴 때만 나온다. 시간 안에 가려면 속도를 올려야 하는데 날씨도 차들도 앞을 가로막는다. 자꾸 시계를 보게 된다. 붐비는 차로 옆에 갓길이 비어 있다. 바라는 대로 질주할 수 있는 길, 편승만 하면 탄탄대로가 보장되는 비상도로. 만사형통을 신께 구하듯 갓길은 신god의 길인지도 모르겠다. 빈 길을 계속 힐끔거리다 신을 등에 업고 보란 듯이 통과하는 상상을 들켜버린다. 갓길도 사라지고 터널로 진입한다. 앞은 더욱 캄캄하고

이제 엉금엉금 기어간다. 신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침묵만이 긴 동굴을 따라 망연히 흐른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길이 쥘부채처럼 펼쳐진다. 움츠렸던 차들이 활개 치며 뻗어 나가고 고속도로는 겨우 체면을 세운다. 그러나 비는 여전히 내려 차선은 번지고 시야도 흐리다. 미등을 켜지 않은 앞차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가물거린다. 조명이 꺼진 차 꽁무니를 눈 흘기며 응시하다 슬쩍 계기판을 보았다. 자동으로 설정해 놓은 내 차 역시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도 위협적인 존재였겠다. 얼른 조명 스위치를 수동으로 켠다. 안 한 것이 아니라 사정이 있어 못할 수도 있는데 센서등은 눈앞에 보이는 대로만 반응하려 든다. 물러서서 측면도 보고 이면도 생각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트럭 한 대가 갓길에 삼각대를 세우고 정차해 있다. 운전자가 어딘가로 다급하게 전화를 한다. 나도 저랬다. 오래전 첫차는 엔진에서 연기가 솟아 가까스로 갓길까지 옮겼고 결국 폐차시켰다. 견인차를 처음 타본 어린 아들만 즐거워했다. 두어 해 전에는 타이어에 대못이 박혔다. 늘어진 바퀴마냥 처져 있던 시기였는데 긴급 출동 차량이 올 때까지 길바닥에서 팔딱팔딱 뛰었다. 갓길은 소란하였고 신은 고요했으나 구멍에 심지를 박고 무사히 돌아왔다. 묵묵부답이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길이 트였다고 함부로 달려서도 안 된다. 과속 단속을 지났더니 금세 구간 단속을 하고 급커브 길도 모자라 야생동물에 안개도 주의하란다. 이어서 이동식 단속 구간이라는 안내에 하마터면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방심하면 언제든 과태료가 날아든다. 톨게이트에 이르러 길이 막혔다고 통행료를 깎아달라 할 수도 없다. 나만 억울한 것은 아니라니 남김없이 값을 치르고 요금소를 빠져나간다.

 

계약서를 적고 짐을 쏟아냈다. 잠만 잘 방이라 해도 이불이며 옷가지, 생필품이 들어가니 아들의 한 구간도 답답한 터널 안 같다. 느닷없는 일들이 끼어들어 모든 것이 갑작스럽다. 주춤거리는 등을 쓸어주고 다시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언젠가 저 등에도 환한 불빛이 들어오겠지. 부려 낸 차는 가벼운데 실어온 마음은 묵직하다. 굵은 빗줄기가 바닥에서 물보라를 일으켜 지나가는 차를 후려친다. 맨 가장자리 길은 한결같이 잠잠하다. 갓길을 나의 전용도로로 만들지 못해 안달복달하였다. 혼잡하고 미끄럽고 추월당하는 주행길로 가야 하는데 무제한 구역을 넘보았다. 나는 가속 페달을 원했고 신은 브레이크를 요구한다. 신의 뜻이 갓길에서만 빛나는 것은 아닐 터. 차로를 넘나들며 속도를 줄이라고 쉬어가도 된다고 졸음 쉼터를 보여준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그 길이 신의 길이다.

 

누구라도 더디 가야 할 때가 있다. 갓길을 탐하지 않기를, 정체된 마음에서도 설핏한 갓길을 볼 수 있기를. 어쩌면 지금 걷고 있는 어긋난 길이 갓길일 수도 있겠다며 혼자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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