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의 품 / 허정진

 

 

대청마루에 누워본다. 어느 시골 한옥마을의 여름 한낮이다. 한달살이하는 친구가 텃밭에 푸성귀를 따러 간 사이 사지를 뻗고 마루에 몸을 맡겼다. 삽상한 바람이 출렁이고 갓 맑은 푸름이 치렁하다. ‘빨리’란 낱말이 낯설어지고, 시계 침 소리도 느려지는 것 같다.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에도 쩍, 허공에 금이 갈 것 같은 고요다. 담장 너머로 덩두렷한 산 능선이 정물화처럼 걸려있고 땡볕의 마당에는 먼 산 뻐꾹새 울음이 휑뎅그렁 뒹군다.

마루가 시원하면서도 따뜻하다. 청정(淸淨)이고 정숙(靜淑)이다. 마룻바닥에 세 들어 사는 바람이 술래잡기하듯 처마와 들창을 들랑거린다. 시공을 초월해 시절 좋은 사극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어렴성 없는 강아지 한 마리 마루 밑에서 턱을 고인 채 슬쩍 쪽잠에 들었다. 고향 집을 찾은 어머니의 품처럼 마음이 평안해져 온다. 바람의 요람인 듯 그늘을 이불 삼아 잠시 눈을 붙여보고 싶다.

가로세로 장방형으로 짜 넣은 마루 귀틀 문양이 너럭바위처럼 듬직하다. 그사이에 끼워 넣은 넓적한 마룻널은 숲의 기억소자처럼 자연 그대로다. 나무의 속살마다 바람결 같은 목리가 함함하고 웅숭깊다. 귀를 가까이 기울이면 자신이 살아온 내력, 숲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다. 마루 가장자리에 표면이 우둘투둘한 옹이 자국이 있다. 설핏, 옥에 티처럼 느껴진다. 그때 ‘결만 있으면 상품인데 옹이가 있어서 작품이다.’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내치지 않고 기꺼이 거두어들인 목수가 오히려 고맙다.

어릴 적 외갓집이 정경처럼 눈앞에 그려진다. 안방과 건넛방 사이 대청마루가 놓였고 가마솥 위에 누마루, 뒤란에 쪽마루가 있었다. 대청에는 서책이나 사방탁자, 목물(木物)이나 다듬돌 같은 간단한 가재도구들이 모서리를 차지했고 마루 끝에 뒤주와 작은 궤짝이 있었다. 특히 궤짝 안에는 곶감이나 밤 같은 주전부리가 들어있어서 오며 가며 눈독을 들였던 것 같다.

대청마루가 생활 동선의 중심이고 거점이었다. 음식을 장만하고 숯불 다림질을 하는 옥내작업장이기도 하고, 관혼상제를 지내거나 손님을 맞는 필요불가결한 장소였다. 여름이면 각 방문을 들어열개하고 마루로 나와 두리반을 펴놓고 밥도 먹고, 공부도 하고, 배를 드러내고 낮잠 자는 곳이기도 했다. 눈을 뜨고 하루를 여는 첫걸음이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기도를 하는 가족 공동체의 공간이었다.

그곳은 소통의 자리이기도 했다. 마루가 있어 흩어진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었다. 가족을 끌어모으고, 언어가 비대해지고, 집안의 기운이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가끔은 집을 지키는 마루의 성주신에게 안당굿도 큰 구경거리였다. 손님에게 자리를 내어주거나 길손이 잠시 귀퉁이에 앉았다 쉬어갈 수 있는 곳도 마루였다. 아이 울음소리, 글 읽는 소리, 다듬이 소리의 삼희성(三喜聲)도 마루가 있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마루는 반가사유상처럼 큰 귀를 가졌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귀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소리를 호오(好惡)의 구별 없이 받아들인다. 새겨듣고 싶은 덕담도, 끼어들고 싶은 정담들이 강물처럼 흐른다. 그뿐인가. 듣고 싶지 않은 악담도, 털어내고 싶은 괴담도 있다. 하지만 마루는 고해성사 신부처럼 침묵으로 일관한다. 집의 내력과 온갖 희로애락을 비밀의 방처럼 나이테에 저장하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삐거덕거리는 뼈 울음도 있었을 터. 마루기둥에 기대어 객지에 나간 자식들 기다리는 은결든 울음도, 먼 길 떠난 낭군님 그리움에 가만한 한숨도 있었을 것이다. 집안에 우환이나 사고로 전전반측하거나, 대청 너머 씨받이 방을 찾아가는 대감마님의 숨죽인 발걸음을 들으며 고금(孤衾)의 하얀 밤을 보내야 했던 때는 혹시 없었을까. 그럴 때마다 마루는 슬픔의 바닥이 되어 혼자 앓고, 혼자 아파하면서 울렁이는 시간을 견뎌냈을 것이다.

마루의 품이 넉넉하기만 하다. 뜨거운 물을 바닥에 쏟거나, 조무래기들 쿵쾅대어도 아무 말 없이 모든 것을 수용한다. 겨울이라고 따뜻한 온돌을 부러워하지도, 밤마다 빗살무늬로 쌓이는 달빛에도 외로워하지 않는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냄새나고 젖은 발을 올려놓아도 더럽다고 외면하는 법이 없다. 태생이 청빈해서 그저 바람 소리, 빗소리만으로도 영혼의 안식처는 한 뼘씩 넓어져 간다.

벽이 없는 방이 마루다. 갇혀있는 곳이 아니라 열려있는 곳, 마당을 양육하면서 안과 바깥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곳이다. 텅 빈 허공 같은 마루지만 생의 열기로 충만한 집안의 중심부다. 현대인의 주거환경에는 거실이 마루를 대신한다. 사시사철 이용이 가능한 곳이지만 사람들이 갈수록 이기적이고, 혼자만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개별적인 삶으로 변해가고 있다. 벽이 높을수록 안전에 앞서 고립되기 쉬운 법,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자연의 순리와 이치에서 멀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마루는 사람이 있어 존재한다. 인간과 똑같이 호흡하며 생로병사의 여정을 함께 한다. 사람이 없으면 방부제 없는 식품처럼 금방 삭아지고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틈만 나면 구석구석 손걸레질을 하던 어머니가 있어 낡은 마루도 반질반질하게 생기가 돌았다. 시간의 등짝 같은 마룻널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면 옛날 올망졸망했던 식구들, 어머니의 지청구마저 정겨움이 되어 눈앞에 다가온다.

마루에 걸터앉아 하늘을 보고 바람을 맞고 내일을 본다. 습자지처럼 투명해진 맑은 공기가 온몸으로 파고든다. ‘휴(休)’라는 방점을 찍으니 그제야 비움과 느림이 보인다. 정가(正歌) 같은 여유며, 간이역 같은 여백이다. 각다분한 세상일에 멍들었던 친구가 대청마루가 있는 이 집에서 그대로 평생살이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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