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 윤혜주

 

봄이를 봤다. 시장 모퉁이 화장품점 앞이다.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볕 바른 자리에 배시시 드러누워 작은 코를 실룩이고 있다. 새어 나오는 향을 음미하는지, 아니면 이곳에 잠시 머물다 사라진 제 새끼 냄새를 쫓는지 까무룩하다. 쓰담쓰담 토닥였다. 늘 그랬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반갑게 바라봐 주지 않았다. 되작여도 서운한 척 능청이다. 맹랑하면서 스산스러운 봄이다. 웬일일까. “봄아” 나직이 이름을 부르는 순간 가랑가랑 갇혔던 눈물이 흐른다.

봄이는 내 애틋한 멘토다. 상처받거나 지칠 때 하염없이 바라보며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대상이다.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살면서 나만 힘들다는 생각으로 부글거릴 때, 나 자신이 너무 가련해서 소중한 인연을 속절없이 놓아 버릴까 두려울 때도 봄이를 찾았다. 그때마다 봄이는 배가 불러 있거나, 토실토실한 제 새끼들을 세상 편한 모습으로 품고 있었다. 마치 난전 그곳이 거룩한 성전인 양, 주인 최씨 할머니가 내준 종이상자에 구겨 누워 오글오글 달라붙는 제 새끼들에 젖 물리는 경건한 그 모습에 마음 다독여 돌아오곤 했었다.

잡종견 봄이는 하얀 털에 갈색 점박이, 작은 몸집으로 보일 듯 말 듯 한 존재다.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미지근한 체온 같거나, 근근이 남아 있다가 곧 휘발될 희미한 냄새 같은 존재다. 그러나 모성애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마음을 움직여 누군가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존재기도 하다. 시장 소음에 스트레스를 받아 자기 깃털을 뽑으며 괴성을 지르는 앞집 앵무와는 대조적이다. 꼬이지 않은 성격에 매 순간 삶을 낭비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듯하다. 따박따박 남의 말 흉내 내느라 강파른 하루를 보내는 앵무와 달리 잘 짖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하고 안심할 수 있는 하루면 그뿐이다. 반려견으로‘의미 있는 타자(他者)’가 되어 최씨 할머니네 가족 구성원으로 인간과 동물이 행복하고 지속적인 관계의 삶을, 아무나를 사랑하지 않는 비루한 인간들에게 보란 듯 어울리는 공생의 삶을 산다.

떠올리면 몸 어딘가 저려 오는 봄이를 닮은 한 여인이 있었다. 그저 외로워서 순풍순풍 아이 아홉을 낳아 내 편으로 키웠다는 여인. 남하하던 피난길에 가족들의 손을 놓쳐 버리고 평생 두 눈에 눈물 담고 살던 의주댁이라는 여인이었다. 단신의 체격에 바지런하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열차가 떠난 후 홀로 남아 기차역을 지키는 철도원의 적막한 모습으로 피붙이를 향한 그리움의 삶이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시어머니와 딴살림 차리느라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 그의 여인들까지 품고 마치 희망에 대한 심오한 탐색이나 하듯 비문이나 헛된 문장 하나 흘리지 않고 초연했던 여인. 그러나 정작 그녀는 혼자였다. 하여 아이를 낳아 품을 때라야 누군가의 관심과 시선이 닿아 마음이 데워져 삶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다던 이였다. 어쩌면 봄이도 의주댁도 숙명처럼 생명을 품어 내놓을 때만이 살아온 삶의 기적이 살아갈 삶의 기적이 됐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세상 마음 둘 곳 없어 마음의 짐을 덜거나, 기대고 싶을 때 충만하게 몰입할 대상이었는지도.

우리 삶의 본질은 결국 ‘주는 것’이다. 그것이 감동이든, 웃음이든, 위안이든 우리가 바라는 걸 얻으려면 타인에게 뭔가를 주어야 하는 삶이다. 주는 삶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삶이기에 때론 한줄기 소나기가 고맙고, 뺨에 스치는 소슬한 바람 한 줄기도 고맙다. 그런 존재들이 있어 문득 생의 어느 순간이 고맙게 느껴지는 것도 인생의 의미가 타인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타인에게 주려는 삶에 집중하는 건 가장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것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주위를 잘 거두는 인정 어린 마음으로 줄 게 많고, 줄 줄 아는 사람이 많아 미소와 포옹이 수북이 쌓이는 그런 세상을 나는 여전히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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