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장은 붉은 방점으로 시작했다 / 라환희

 

비는 도솔천을 따라 구부러지며 이어졌다. 장우산 안으로 몸을 사려도 스미는 눅눅함을 피할 수 없다. 무심결에 힘이 들어갔는지 어깨가 결려온다. 힘을 빼며 일주문을 지난다. 한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고 비까지 내려서인지 우산 몇이 부유하듯 오갈 뿐 경내는 적요하다. 맞은편 대웅보전 전각을 향해 마당을 가로지른다.

산자락 솔기마다 깃든 비에 모퉁이로 향할수록 물내가 물씬하다. 맞배지붕을 받치고 선 두리기둥을 돌아들자 지난주 기상캐스터 예보대로 봄이 당도해 있다. 기대했던 것처럼 나무 아래까지 붉은 물이 들기 시작한다. 빗줄기는 전경에 사선을 긋지만 올해도 때를 잘 맞춘 것 같아 흡족한 마음으로 처마 밑에 들어선다. 대웅보전 뒤란 처마가 내주는 한 자 품이 넉넉하다.

고즈넉함이 묻어나는 이 뒤란은 봄이 시작되는 즈음이면 동백꽃을 보려는 사람들로 붐비곤 하는데 오늘은 비 덕분인지 한산하다. 모처럼 고요해져 번잡한 마음을 접고 우산처럼 벽에 기댄다. 시야 가득 꽃물이 든다. 몇 번인가 이곳에서 봄을 맞았는데 오늘처럼 비 내리는 풍경은 처음이라서인지 느낌이 새롭다. 빗물 머금은 꽃이 농익었다.

봄 마중하는 상춘객이 개화기에 맞춰 이곳을 찾는 것과 달리 나는 매번 꽃이 만발한 시기를 피해 찾게 된다. 이는 번잡함을 면하기 위함도 있지만, 무엇보다 동백꽃의 절정을 보고자 함이다. 꽃망울이 벙글어질 즈음이 예쁜 대부분 꽃과 달리 동백은 낙홍의 순간이 최고의 경지다. 마지막 순간의 결연함. 그 선홍빛이 일순간에 지는 처연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여운을 남긴다.

소란스러움이 잦아든 절간의 한적함이 물안개를 부른다. 한 문장이 끝나고 다음 문장이 시작되기 전의 휴지부이다. 이 침묵은 옷깃을 여미듯 소리가 현현하는 순간을 들여다보기에 안성맞춤이다. 꽃소식이 시작되는 이른 봄이면 습관처럼 이곳 동백숲을 떠올린다. 왜일까. 집 근처 공원에 즐비한 동백나무를 두고도 선운사 동백을 봐야 한다는 조바심을 버릴 수 없다. 때깔 고운 꽃을 보고자 하면 하루가 다르게 개량종을 선보이는 화원을 찾으면 될 터인데, 그도 당기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소리 때문이지 싶다. 화단이나 보도블록 위로 떨어지는 동백꽃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이 숲에는 있다.

뿌리가 내린 깊이만큼 울울창창한 숲 그늘은 수백 년을 두고 떨어진 꽃들의 높이다. 묵은 시간 위로 떨어지는 꽃. 그 근원이 받아내는 맥놀이 같은 낙화 소리가 나를 이곳으로 이끄는 것이다. 잠시 빗줄기가 가늘어진 틈을 타 처마 밑을 나와 동백나무에 다가선다.

숲을 이룬 고목의 관절에서 뚝뚝 세월 꺾이는 소리가 불거질 것 같다. 그런데도 통꽃은 이지러짐 없이 탐스럽다. 이리저리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는 박새 울음소리를 쫓는다. 적막이 잠시 울창한 잎에 가려 자취가 묘연하다. 아무리 봐도 이곳의 동백꽃은 다른 곳의 동백보다 더 붉다. 밀집된 공간에서 향기 대신 강렬한 색으로 동박새의 시선을 끌어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홍의 동백은 극적인 꽃이다. 뒤마의 자전적 소설 《동백꽃 여인》을 원작으로 한 베르디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는 내가 20대에 들어서서야 보게 된 첫 오페라였다. 비록 음대생들의 졸업 작품이었지만 주인공 비올레타가 가슴에 꽂고 있던 동백꽃은 내 기억 속에서 여전히 붉다. 뿐인가 벼랑에서 뛰어내리듯 일순간 떨어지는 선혈의 꽃은 요절한 예술가를 생각하게 한다.

오늘은 며칠 전에 본 명화집 때문인지 모딜리아니의 객혈이 연상되어 검붉은 낙화가 더욱더 애잔하다. 그늘에 찍힌 붉은 마침표처럼 젊은 날 세상을 뜬 예술가의 작품은 대부분 퇴색되지 않은 자신만의 색깔을 간직하고 있다. 모딜리아니의 목 긴 여인이 되어 잠시 허공을 더듬는 사이 툭, 또 하나의 절정이 우주를 깨운다.

그늘이 키운 꽃이 그늘을 밝히는 순간이며 다음 생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다. 소멸을 앞두었음에도 흐트러짐 없는 꽃은 강렬하다. 극치의 순간에 미련 한 잎 남기지 않는 것은 초월이다. 여백을 적시는 빗방울이 굵어진다. 붉고도 둥근 소리에 대웅보전 뒤란이 흥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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