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이야기 염정임

 

 

 

  어느 비 오는 날, 모임이 끝나고 각자의 우산을 챙겨 들면서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 말하기를,

  “우산에는 귀가 있는가 봅니다. 내가 우산 하나를 색깔이 하도 촌스러워서 그만 없어져 버렸으면 하고 미워했더니, 어느 날 정말 없어져 버렸다니까요”해서 모두들 웃은 적이 있다.

  정말 우산이란 것은 슬그머니 없어져 버리기도 하고, 어디선가 엉뚱하게 나타나서 제집인 양 우산꽂이에 꽂혀 있기도 한다.

  긴 장마철이 끝나고 나니 우리 집 우산들이 모두 바뀌어져 있다.

  현관 한 옆에 놓여 있는 우산꽂이에 눈에 익은 우산들은 하나도 안보이고, 처음 보는 자주색, 회색 우산들이 꽂혀 있는 것이다.

  내가 아끼던 코발트색 우산도 없어졌고, 녹색 체크무늬 우산도 없어졌다.

  대학생인 큰딸은 물방울무늬의 우산을 자기 방에 간직하므로 그곳에 있을 터이고, 여고생인 작은딸은 갈색 우산을 가지고 아침 일찍 나가 자정이 가까워야 돌아오니 그대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없어진 우산의 주인은 남편과 중학생인 아들인 것 같다.

  남편에게 우리 우산들이 모두 없어졌다고 하니,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그러나 며칠 전에 나는 그의 자동차 트렁크에서 우산을 세 개씩이나 찾아내었다).

  아들에게, 자주 드나드는 친구들 중에 우산을 두고 간 사람이 누군지 물어보라고 했지만 아무도 잃어버린 사람이 없다고 하니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수필가 가드너가 말한 대로, 우산의 주인을 찾으려는 그 ‘우산 도덕’으로 내가 고민하던 것도 잠깐뿐이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눈에 거슬리던 남의 우산도 점점 눈에 익어가고, 그 우산들이라도 있음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우산들의 주인을 찾아 주기는 정말 불가능해. 어쨌든 우산이란 비를 가리는 데 요긴하게 쓰기만 하면 누가 사용하든 상관없는 것이 아니겠어……’

  하고 나의 ‘우산 양심’은 속삭이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 잃은 우산들은 지금까지 우리집 우산꽂이를 차지하고 있다.

  처음, 내 코발트색 우산이 없어졌을 때에는 가드너가 그랬듯이 그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을 생각하면 무척 속이 상했다.

  코발트색의 무늬가 마치 하늘의 구름 그림자처럼 아롱져 있어, 두 손으로 펼치는 순간 하늘이 활짝 열리는 것 같은 기분을 주던 내 우산……. 가느다란 우산살들이 이루는 그 균형과 질서, 팽팽한 긴장감을 주면서도 둥글게 지붕을 만들 줄 아는 헝겊의 유연성, 그리고 그들을 하나 되게 마무리 짓는 든든한 우산대를 보면서, 그들 간에 이루어지는 역학과 협동의 아름다움에 경탄을 금치 못하곤 했었다. 그 우산을 펴고 접을 때마다 나는 하나의 예술품이나 수공예품을 완상(玩賞)하듯, 이 세상에서 우산을 처음 만든 사람에게 무한한 찬사를 보내곤 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내 파란 우산이 돌고 돌아서 어느 날 다시 우리집 우산꽂이에 넌지시 꽂혀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한 상상이나 할 뿐이다.

  이번에야 나는 큰딸애가 우산을 자기 방에 간직하는 이유를 알았다. 그래서 나도 꽃무늬 우산을 하나 새로 사서 외출에서 돌아오면 옷장 속에 감추어 두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누구나 조그만 것 하나라도 남에게 양보하기 싫어한다.

  그런데 우산에 관한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극히 너그럽고 이타적으로 보이니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은 자기 우산을 여기저기에다 놓고 다니기도 하고 잃어버려도 그렇게 연연해하지 않는 것 같다. 자동차에서 내릴 때에나, 다방에서 떠날 때에도, 익명의 기증인이 되어 앉았던 자리에다 놓아둔 채 나오기도 한다.

  어쩌면 우산이란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순간적이나마 물질에의 집착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마력을 가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의 것’이라고 이름 붙여 놓은 모든 소유의 허망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닌지.

  우산은 현실세계에서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자기중심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늘을 나는 듯한, 참으로 자유로운 상태를 우리에게 예시해 주는 하나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동화 속에서 사람들은 우산을 쓰면 하늘을 날기도 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지 않은가.

  “어디 우산 놓고 오듯/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이 고생이구나……”라는 어느 시구가 생각난다.

  오늘 같은 문명사회에서 아직도 우산이 우리의 삶과 함께 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우리는 날씨가 더우면 스위치 하나로 온도를 조절함으로써, 부채를 부치는 바람을 만들던 운치 있는 모습을 구경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추운 겨울날 난롯가에 앉아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정겨운 모습도 보일러식 난방의 출현으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문명의 이기로도 막을 수 없음은 다행한 일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쓰게 되어 있다. 백 년 전의 우산이나 지금의 우산이나 그 모양에는 별 변함이 없다. 말하자면 우리가 우산을 쓰고 있을 때, 우리는 백 년 전의 문화를 누리고 있는 셈인 것이다. 비록 내가 클라라 슈만이 입던 길고 우아한 의상을 입고 마차를 타고 다닐 수는 없을지라도, 그녀가 쓰던 것과 같은 모양의 우산을 쓴다고 생각하면 즐거운 일이 아닌가.

  아무리 컴퓨터가 발달하고 기계가 인간의 정서와 꿈을 빼앗아 가더라도 비 오는 날의 우산이 우리에게 주는 감미로움과 설렘은 빼앗아 갈 수 없으리라.

  비 오는 날, 가지가지 영롱한 빛깔의 우산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면 도시의 우울함이 사라진다. 마치 잿빛 캔버스에 화려한 색깔의 물감을 칠하듯, 우산은 거리의 풍경을 아름답게 꾸며 주기 때문이다.

  높은 빌딩의, 직선이 난무하는 사이로 무지개빛의 곡선이 떠다니는 것을 보면 누가 나를 부르는 듯 달려 나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 (하늘에서 내려오는 잔잔한 소근거림 ) 를 들으면서 꿈을 꾸듯 황홀해지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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