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가 100인선 엿보기] 달마대사의 관상설 - 안명수

달마대사의 관상설   -   안명수


   어느 선배의 상안검(上眼瞼: 위 눈꺼풀) 수술 얘기가 새삼스럽다. 눈꺼풀에 지방질이 빠져 속눈썹이 눈동자를 찌르는 바람에 쌍꺼풀 수술을 했더니 살 것 같더라고 하면서 덤으로 보탠 한 말씀이 더욱 걸작이었다. 초등학생인 손자 녀석이 할아버지의 수술한 눈 두덩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이제 코 세우기 수술만 하면 할아버지 일 내겠다. old boy 진짜 큰일 내겠네 ㅋㅋ…”
   나 역시 지난해 백내장 수술을 한 후 속눈썹의 공격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처지라, 선배님처럼 큰일 낼 수술을 해야 되지 않을까 고민 중이었는데, 근자에 이르러 별탈이 없어서 천만다행이다.

   달마達磨대사의 속눈썹에 얽힌 야화野話는 너무 기괴하고 코믹하여 호사가들의 입방아마저 조심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대사께서 면벽참선面壁參禪을 하시는데 속눈썹이 눈동자를 찌르는 바람에 생각의 끈이 수시로 끊어져 마음의 침잠沈潛을 잃게 되었다. 양자강, 황하를 건널 때, 나뭇잎 한 잎 뜯어 입김을 훅 불어넣으면 배가 되는 도술을 지닌 천하제일의 술사였지만 속눈썹의 공격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오래도록 속을 썩이다가 어느 날 분연히 결단을 내리기로 작심하였다.
   눈동자가 눈썹에 호되게 찔린 어느 날, 눈썹 전부를 싹 뽑아서 마당에 던져버렸다. 대사의 도력道力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눈썹이 떨어진 자리에 파란 싹이 올라와 나무가 되어 자라는 게 아닌가. 보드라운 잎이 무성하여 보기 좋은 녹차나무로 자랐다. 소림사에서 수련하고 있던 승려들이 큰 스님의 도력을 받아보겠다는 일념一念으로 그 나무의 잎을 따서 삶아 먹었다. 잎 삶은 물을 마실 때마다 마음이 안정되어 평정심을 잃지 않고 평안함을 느끼게 되어 스님들 모두가 이 기발한 행사에 동참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차茶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차茶 문화가 불교 국가에서 유달리 번성하고 있는 원인도 이런 픽션(?)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불교가 왕성했던 신라와 고려에서는 차 마시는 예도禮度가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 때문에 불교문화는 산속으로 들어가 승려들끼리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퇴락하였다. 유학儒學이 과거科擧의 중심 과목이 되고, 생활의 지침이 되면서 불교국가에서 민초들이 즐겼던 차문화는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 대신 이태백, 도연명, 소동파와 같은 문장가들이 즐겼던 술 문화가 양반들의 의식세계를 점령하였다. 차와 술이 대등한 차원으로 발전하였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불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답답하다.
   차는 이성理性을 자극하여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게 하고, 술은 감성을 활성화시켜 예술적인 감각을 날카롭게 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게 되면 사람의 능력을 반半밖에 활용하지 못하는 어중치가 된다. 차의 특성은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아폴론적인 문명을 번창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아폴론은 빛의 신으로 음악, 시, 예언을 관장하였다.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다. 니체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며 원초적인 예술을 두고 ‘디오니소스적’이라 하였다. 아폴론적인 이성과 디오니소스적인 감성이 조화롭게 융합될 때 문화의 다양성은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된다.
   인간의 두뇌에서 작용하고 있는 <아데노신>은 사색하는 사람들의 독창적인 사고를 관장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오랜 시간 사고思考에 몰입하면 피곤해진다. 아데노신 에너지가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면 사고력이 집중되고 머리가 개운해진다. 이런 현상은 카페인이 두뇌로 하여금 에너지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도록 작용하기 때문이다. 카페인이 혈류血流로 들어가면 아드레날린과 코티솔 호르몬을 활성화시켜 각성효과를 증가시킨다.
   술은 창조적 사고를 유발시킨다. 머릿속에 작동하고 있는 체계적인 기억을 감소시켜 자질구레한 일상사에는 신경이 무뎌진다.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잠시나마 잊어버리게 하여 복잡한 두뇌를 단순화시킨다. 이런 술의 작용이 창조적 사고에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두뇌로 하여금 한 가지 생각에 깊이 몰입토록 작용한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7일 때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가 된다. 이 순간 작가는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통쾌하게 조우한다.

   달마대사의 괴팍한 성깔을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사찰 벽화 가운데 <혜가단비도>는 달마의 괴팍한 성질을 암시하는 명화라고 할 수 있다. 대사께서 소림사에서 9년째 면벽참선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주 추운 겨울밤 유불선儒彿仙의 이치를 통달한 신광이란 스님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였다. 대사는 면벽한 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신광은 눈 내리는 추운 겨울밤을 마당에 꿇어 앉아 하명下命을 기다렸다. 얼음 덩어리로 굳어진 신광을 향하여 “하룻밤의 얄팍한 덕으로 큰 지혜를 얻고자 하느냐?”며 그 괴팍한 성깔을 쏟아 부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란 말처럼 신광의 고집 또한 대단하여, 바랑 속에 넣어둔 칼을 꺼내어 왼쪽 팔을 잘라 구도 결심의 단호함을 보여주었다. 이에 대사는 신광의 입문入門을 승낙하여, 법명法名을 혜가慧可라 하였다. 혜가 스님은 달마대사의 뒤를 이어 중국 선종의 이대二代 조사祖師가 되었다.
   달마대사의 괴팍한 성깔은 자신을 향해서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뽑아버린 눈썹이 다시 자라 더 강하게 찌르는 바람에 이번에는 아예 가위를 가지고 와서 위 눈까풀을 싹둑 잘라버렸다. 이런 까닭으로 달마대사의 눈망울은 콧날보다 더 앞으로 튀어나와 둥근 공처럼 덜렁거리고 있다. 달마 화상畵像을 그리는 화가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퉁방울 같은 눈동자 그리기라 한다. 달마의 퉁방울 눈동자를 잘 살린 초상화를 벽에 걸어두면 역병마저 도망치고 없었다고 전해진다. 서민 가정에서는 대사의 초상화 한 점 구하는 것이 큰 소망이었고, 소유한 초상화는 귀중한 가보家寶로 대물림 하였다.
   일본에서는 새해가 되면 가정에서나 회사에서 달마대사 인형을 만지면서 소원성취를 기원祈願한다. 나무로 깎은 달마대사 인형의 눈동자에 색을 칠하면서 새해의 소원을 중얼거린다. 새해의 소원을 기원할 때에는 한쪽 눈알만 칠하고, 소원이 달성되었을 때, 칠하지 않고 남겨두었던 나머지 눈알을 마저 칠하여 인형을 완성시킨다. 문제는 소원을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정으로 일본의 가게에는 애꾸눈 달마가 공공연히 판매되고 있다. 대사를 능멸하는 못된 행동 같아서 기분이 찜찜하다. 달마대사를 애꾸눈으로 만든 일본인들의 쪽발이 근성은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특히 역사를 보는 시각이야말로 대표적인 쪽발이 근성이라 하겠다. 일본을 대표하는 아베 총리는 쪽발이 대장답게 피해를 입힌 이웃나라들에게 반성은 고사하고 재침의 기회만 노리고 있다.

   일본의 사찰 수는 8만여 개, 승려는 약 20만 명, 신자 수는 8천 800만 명이라 한다. 인구 1억 2천만 명 정도인 일본은 대부분이 불교신자인 셈이다. 기독교는 2% 정도라 하니 ‘탈脫 아시아’를 외치는 속마음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일본의 불교 가운데서도 신도의 세력이 크다고 알려진 니치렌종(日蓮宗)은 “남묘호렌게쿄” 한 마디만 열심히 외우면 구원을 받는다고 설파한다. 법화경을 이 한마디 말로 축소시켜 놓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 종파는 <창가학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전 세계에 세력을 펼치려고 기를 쓰고 있다.
   교세가 아주 큰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승려들은 고기를 먹고, 결혼도 하며, 가정을 가져도 된다. 그런데도 염불만 열심히 외우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교파이기 때문에 대중들이 많이 모여들게 되었다. 일본불교는 7개 계통에 108개 종파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들 장례불교라 할 만큼 사자死者의 장례식을 철저하게 불교식으로 치르기 때문에 불교가 생활의 중심이 되어 불교문화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제3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은 종교 전쟁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종교인 숫자로 보면 다소 차이는 있으나 그 세력은 비슷하다. Pew Research Center에서 2010년부터 조사한 전 세계 종교인구 현황을 발표한 바 있다. 230여 개국을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약 31%, 무슬림은 23%, 힌두교와 불교를 합친 인원은 22%, 등으로 조사되었다. 유교를 종교라 하기에는 약간 어색하지만 중국의 인구를 감안하면 30-40%는 충분할 것이니 4대 종교가 세계대전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도 남지 않을까.
   종교적인 갈등 관계는 타협이나 대화로는 소통이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특정 종교가 국민정서를 획일화시켜, 새로운 시대와 앞선 사고에 대한 빠른 적응에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천만다행이라 하겠다. 이슬람국가들이나 북한처럼 종교적인 관념이나, 빗나간 유일사상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달마대사가 환생한들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을까.




   안명수 월간 《수필문학》등단.
     수필집: 『좋은 글의 추錘에는 날개가 있다』,『소금과 목탁』,『영혼의 빛깔』,『사랑과 영혼의 언어들』,『4月의 변주곡』,  시집:『산울림』,  칼럼집:『낙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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