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가 100인선 엿보기] 슬픈 메트로폴리탄 - 서숙 | 



   슬픈 메트로폴리탄   -   서숙

 버스는 이제 파리를 벗어나 시골길을 달린다. 정작 파리 시내 관광보다 나는 저 전원 풍경이 더 마음에 든다. 황금빛 밀밭이 넓게 펼쳐진 가운데 종탑이 아름다운 교회를 중심으로 빨간 지붕을 인 자그마한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골 농가의 정경들은 한결같이 평화롭고 고즈넉하다. 키 큰 포풀라, 날씬한 자작나무, 그리고 사과밭. 나무에 매달린 사과 색깔이 연두색으로부터 새빨간색까지 온갖 초록과 온갖 빨강으로 그 농담을 다채롭게 하여 점묘파의 그림 마냥 아른아른하다.

   어쩌면 인간들은 이렇게 구석구석 모여 사는지, 나는 항상 그 당연한 사실이 신기하고 새롭다. 저곳에 사는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세상을, 또는 산다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저 경치를 동경하는 만큼 나도 저 속에서 저 사람들처럼 살고 싶은가. 나는 저렇게 살고 싶었던가.


   이미 A.D.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 있었던 전원도시 폼페이가 누렸던 헬레니즘시대에 벌써 사람들은 전원생활을 동경했다.…테오크리토스(Theocritos)같은 시인들이 목동들의 소박한 삶의 매력을 발견했던 헬레니즘시대에 와서는 미술가들 또한 복잡한 도시거주자를 위해서 전원의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목가적인 풍경을 구성하는 모든 것, 이를테면 목동과 소, 소박한 사당과 멀리보이는 별장과 산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이다.*


   그때 그 헬레니즘시대 도시 거주민이나, 약 2,000년 후 서울이라는 거대한 메트로폴리스가 삶의 터전인 내가 자연에 대해서 품는 동경은 결국 이렇게 같은 것이다. 시대는 크게 변하는 것 같지만 인간의 심성의 근원은 그다지 세월을 통해 변하는 것이 없다는 이치이다.
   로렌스(D.H.Lawrence;1885-1930)는 그에게 명성과 혹평을 동시에 가져다 준 영국의 도시를 떠나 이탈리아의 시골에서 사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그들의 조그마한 농가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감옥과도 같은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과 내 생활이 평행하며, 서로 관계를 가지고 영위되어 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내 바로 옆에 있어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싶은 것이다.…


   결국 노동은 안하고 즐기기만 하겠다는 욕심이겠다. 한 송이 장미꽃을 피우기 위해 작업복 차림으로 정성껏 가꾸는 사람 따로, 아름답게 피워 낸 장미의 자태를 즐기기만 하면 되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게 세상살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대체로 두 종류의 인간 군群이 있는 것 같다. 고단하게 수고하고 애쓰는 삶이 있고, 그러한 수고 덕분에 이루어진 성과만을 즐기고 그 과실을 따먹기만 하면 되는 삶이 있다. 그런데 대다수가 생각하는 행복의 실체는 후자의 삶이 아닐까.

   장미의 아름다움만을 취하고 그 심층과 배면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유치한 감상과 미숙한 감성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이것을 곧잘 심미적 감수성으로 혼동하곤 한다. 표피적인 삶이 지니는 이러한 허구는 스노비즘, 속물주의라 불리는 경멸의 대상이지만, 애석하게도 우리 어설픈 문명인들은 거개가 다 문화속물이라고 불리는 사이비의식으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
   탐나는 것은 뭐든지 다 움켜쥐고 말겠다는 굳은 결의에 차있는 이 시대 도시 중산층은 탐욕 무한, 그 가공할 진취적 노력의 결과로 편안하고 안락한 도시민의 일상을 창조하였으되 거기가 욕망의 끝자락은 아니다.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들답게 이제 와서는 다시 ‘도시의 인스턴트 삶에 지쳤노라. 저 푸른 초원에서 자연과 벗하고 싶다.’ 라고 ‘소망’이라는 고상한 말로 포장된 이기심과 허위의식, 그리고 끝없는 소유욕을 드러낸다. 이때 이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영상은 필경 넓게 펼쳐진 푸르른 초지일 뿐 가축들이 풍기는 악취나 농촌생활이 수반하는 고된 노역과는 무관하다. 이즈음 이상적 삶의 형태로 떠오르는 새 모델은 이런 것이다.

   ‘그림 같은 경치가 펼쳐진 한가한 시골에 지중해 풍의 전원주택을 한 채 마련한다. 실내에는 이 시대 최첨단의 문명기제가 요즈음 유행하는 젠(Zen;禪)스타일이 가미된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인테리어로 산뜻하면서도 기품 있게 꾸며져 있다. 매일의 삶은 결코 도시와 유리될 수 없다. 사이버 시대의 도래 덕분에 나의 삶은 시공을 초월한다. 도시 속의 나와 전원 속의 나는 이렇듯 분리되지 않고 손쉽게 양손에 떡을 쥘 수 있도록 해 준다.’
   도시인이면서 도시를 경멸하고 농업이 부여하는 노동가치를 거부하면서 농촌의 삶을 동경하는, 대부분의 도시인들이 지니는 이 총체적 위선과 허구의 정답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 이미 18세기에 볼테르는 정곡을 찌르고 있다.


   나는 노파에게 자신의 영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지 못해서 불행한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노파는 내 질문의 뜻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다. 노파는 일생을 통해 한 순간이나마 선량한 브라만을 괴롭혀 온 문제들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노파는 마음 속 깊이 비쉬누(힌두교의 신)의 전생을 믿었고 만일 갠지스강의 성수를 약간 구해서 세정식만 할 수 있다면 가장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브라만에게 돌아가 말했다. “당신이 있는 곳에서 50야드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행복하게 사는 인간이 있건만, 당신은 이렇게 비참한 기분으로 사는 것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는 대답했다. “당신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원하는 행복은 아닙니다.”**


   신의 존재 등 당연시하던 것에 의문을 품고 애매모호한 것을 거부하는 이성에 눈 뜬 덕분에 몸도 마음도 단순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계몽주의 이래의 얼치기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들은 낙원으로부터 추방된, 행복은 아연 저 멀리에 있는 슬픈 존재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태초의 삶의 양식으로부터 유리遊離되어 이미 먼길을 와 버린 우리 도시인들에게 전원생활에 동화되어 진정한 자연인으로 되돌아가 충일한 삶을 사는 것은 이제 불가능에 가깝다. 무엇이든 피상적인 접근으로는 진실에 도달할 수 없고 따라서 진정한 행복의 길도 요원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마주하게되면 그럴때마다 딱하게도 자연의 품속에 묻히고 싶다는 절망 같은 소망을 포기하지도 못한다. 이때 한 목소리가 가만히 타이르듯 속삭인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그대들이 원하는 행복의 궁극이 아닙니다.’
   어느덧 어둠이 깔리고 조명을 받아 아름다운 성이 저 멀리 언덕 위에 모습을 보인다. 버스는 스위스에 접한 프랑스의 국경도시 디종에 가깝게 다가서고 있다.


   *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 볼테르 <철학사전>



서숙 님은 2001년 《계간수필》천료. 2017년 《에세이포레》평론 등단.
수필집: 『일부러 길을 잃다』 『푸른 방』 『숨은 기억 찾기』 『그래서, 너를 본다』 『슬픈 메트로폴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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