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가 100인선 엿보기] 유토피아로의 초대 - 김애양 

유토피아로의 초대   -   김애양


   어린 시절 우리 오남매는 어지간히도 싸우면서 컸다. 맏언니보다 11살이나 어린 나는 싸움의 상대도 되지 않았으련만 언니들에게 울며불며 대드는 일이 잦았다. 그 원인제공은 주로 둘째 언니가 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대학에 다녔던 그 언니는 나머지 식구들과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 예를 들어 김장을 담그는 날에 온 가족이 모여 절인 배추를 나르고 무를 채치느라 분주한데 혼자만 외출을 단행했다. 봄맞이 대청소나 도배하는 날에도 언제나 불참이었다. 어머니의 일손을 덜어 드리고자 딸들이 순번을 돌며 설거지 차례를 정했지만 둘째 언니는 절대로 응하지 않았다. 결국 나머지 세 자매만 번갈아 일을 해야 했다. 집안일을 돕지 않겠다는 언니의 이유는 더 기가 막혔다. 자신은 장차 미국에 갈 계획이므로 모든 것이 기계화된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자질구레한 일을 하지 않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설거지 따위는 식기세척기가 다 해 줄 테니 오직 버튼 누르는 연습만 하면 된다면서…….
   그런 언니가 몹시 얄밉고 그의 몫의 일을 맡아 한다는 게 엄청 분했지만 내심 언니가 꿈꾸는 별천지가 궁금하기도 했었다. 식구 중에서 가장 출중한 미모에다 생각이 진취적인 둘째언니는 곧잘 내게 선진국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 집 마당의 수도꼭지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더운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목욕탕이라든지, 정기적으로 오물을 퍼내는 대신에 줄만 당기면 삽시간에 흔적이 씻기는 수세식 변소라든지, 옷장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한 판국에 음식을 차갑게 보관한다는 찬장 등을 설명하면 나도 덩달아 미국에 대한 선망이 샘솟곤 했다. 하지만 겨울이면 손등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터져서 글리세린을 바르고 자도 여전히 피가 나던 시절이었던 만큼 도무지 언니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어떤 때는 듣다못해 뻥 좀 그만 쳐라, 그런 나라가 어딨겠냐고 덤비기도 했다. 그러면 언니는 “글쎄 거긴 유토피아라니까.”라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때 처음 들었던 유토피아란 단어에 홀려 언니의 온갖 횡포를 잠시 잊기도 했는데 그 언니는 졸업을 하자마자 미국 땅으로 떠났으므로 자신이 추구한 대로 손에 물을 묻히고 살았는지 말았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어쩌다 귀국을 하면 모국의 변화에 혀를 내두르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돌아보면 불과 30년 사이에 우리나라가 이룬 경제발전은 기적과도 같다. 어쩌다 미국 드라마를 봐도 지금의 우리만큼 안락하게 사는 것 같지 않다. 당장 북한만 해도 우리와는 생활수준을 비교조차 할 수 없고 요즈음 민주화 운동이 불기 시작한 아랍 국가들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앞서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 언니가 말하던 유토피아에 나는 이미 도달해 있는 게 아닐까?

   모처럼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꺼내 보았다.
   1516년 당시의 영국 빅토리아 왕조를 풍자하느라 쓰였다는 이 책에는 이상 국가가 그려져 있다.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이 하루 중 6시간씩만 일을 한다. 남녀노소가 모두 균등한 노동을 하므로 육체노동으로 허덕일 까닭이 없다. 남은 시간은 교양을 함양시키는 데 할애한다. 바로 유토피아에서 추구하는 바가 자유와 교양이기 때문이다. 공정하게 선출된 공무원들이 이들의 삶을 돌보는 일을 맡는다. 유토피아인들은 허례허식을 지양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자연에 따르는 삶을 덕이라 정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유토피아라면 의당 질병 따위는 없을 것 같은데 진료와 병원에 대한 설명도 나온다. 유토피아의 병원은 크고 널찍해서 환자들을 쾌적하게 수용하고 또한 전염병 격리에 철저하다는 내용이다. 유능한 의사들이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시설과 장비가 좋아서 환자들이 집보다 병원을 선호한단다. 의사가 지정한 음식을 환자에게 우선적으로 주고 남은 것을 회관으로 분배한다는 것으로 미루어 환자들을 배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을 읽다보니 토머스 모어가 제시한 이상향이 현대인의 삶보다 나을 것도 없어 보인다. 사형 폐지를 주장하는 등 휴머니즘을 강조하지만 그곳엔 여전히 노예계급이 있었고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공동체라 개선할 점도 눈에 뜨인다. 거기에다가 화폐도 없고, 도박도 없고, 술집도 없고, 사창가도 없고, 타락할 기회도 없고, 숨을 곳도 없으며 비밀 집회를 할 장소도 없다는 대목에 이르면 거기는 참 무료한 곳 같다. 우리는 이미 그의 유토피아를 뛰어넘은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로 ‘아무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으로서 영어로는 노웨어 Nowhere이다. 이걸 나누어 읽으면 나우 히어 Now Here가 된다. ‘지금 여기’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유토피아는 봄 햇살이 눈부시게 퍼지는 지금 내 진료실인 셈이다. 비록 인생은 언제나 불만투성이지만 더 이상 두리번거리지 말고, 또 다른 정토를 꿈꾸지도 말고 오늘 내가 사는 여기를 유토피아라 믿어 보리라.



김애양 님은 1998년 ≪책과 인생≫으로 등단. 수필집 『초대』 『의사로 산다는 것 1.2』 『위로』 『명작 속의 질병이야기』 『아프지 마세요』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