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호수에서 빠져나오다    -    송명림


   1986년 겨울 강릉의 경포호는 꽁꽁 얼어붙었다. 어쩌다보니 나는 그 얼음 틈새로 빠졌다. 물론 살아났으니 이 글을 쓰고 있겠지. 그날 난 발밑이 한순간에 꺼지는 경험을 하며 두 가지 소중했던 걸 잃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난 저축에 열심이어서 저축상을 받기도 했다. 용돈은 항상 공무원의 딸답게 아껴 썼다. 나머지를 모아 매달 저축의 날 학교로 가져가 다람쥐 도토리 더미마냥 쌓아두고 있었다. 덕분에 난 대학을 졸업할 땐 100만 원을 훌쩍 넘는 꽤나 큰 목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나는 목표가 있었다. 항상 궁금한 게 많던 나를 어르신들은 ‘호기심여사’라 불렀다.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자동차를 한 대 사려고 맘먹었다. 미리 운전면허도 따두었다. 그 금액으로는 빠듯하지만 당시 ‘포니’나 ‘르망’ 같은 소형 중고차 한 대를 꿈꾸어 볼 만했다.
   하지만 내 저금은 차가 아닌 핫셀블라드라는 카메라 한 대로 둔갑했다. 나는 대학원에서 사진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어 전문가용 카메라가 절실했다. 쓰고 있던 니콘보다는 색감이 부드럽고 인물사진에 따뜻한 아우라를 더해주는 핫셀이 갖고 싶었다. 위에서 아래로 뷰파인더를 내려다보며 찍는 프로다운 폼도 살짝 한몫했다. 졸업 논문의 테마가 된 나의 우상, 리차드 아베돈이 늘 핫셀로 작업을 했다는 사실도 거들었다. 핫셀은 내게 카메라, 그 이상의 존재였다.
   당시 난 수업이 끝나면 하프 타임 약사로 근무했다. 비싼 필름값을 벌어야 했다. 늦은 밤 퇴근 무렵이면 약국 앞 골목에 낡은 포니를 대고 기다리던 남자 동기생. 그렇게 한 달쯤을 계속하더니 사귀자고 했다. 나는 확신이 안 서니 ‘계약연애’는 어떠냐고 물었다. 
   ‘너 나, 남자 친구 여자 친구라 부른다.’
   ‘세 달 후 다시 검토하여 그 다음 어떻게 할지 정한다.’
   이런 조건을 제시하니 자존심은 상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하겠다고 말했다. 그 후 우린 공식 캠퍼스커플이 되었다. 그는 내게 첫 남자친구였다.
   그렇게 두 달쯤 되었을 때 그는 갑자기 계약해지를 하자고 했다. 당시 유행가요인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란 시디를 주며 내가 꼭 그랬단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계약파기를 선언했다. 그 후에도 5층 내 방 창문에서 내려다보면 강변도로 갓길에 서 있는 그의 차가 자주 보였다. 사람 마음이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나 보다. 물결처럼 흔들렸다. 나는 이제 제대로 사귀어 보겠냐고 물었다. 그는 기다렸던 말이라며 좋아했다. 우린 이후 많은 추억을 함께 쌓았다. 하지만 잦은 다툼으로 서로 지쳐가고 있을 때였다.
   유난히 춥던 그 겨울 어느 날, 난 핫셀과 니콘을 목에 걸고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멘 채 꽁꽁 언 경포호수 위에서 그와 함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지도 작가님과 대학 사진반 후배들도 함께 간 출사라 여러 명이 내 주위에 있었다.
   그때 난 핫셀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빙판 가장자리의 갈대에 푹 빠져있었다. 시원한 경포호의 스카이라인과 물결치는 갈대를 동시에 넣고 싶어 광각렌즈로 갈아끼우고는 자꾸만 한 발씩 얼음 약한 부분으로 다가갔었나 보다. 광각렌즈는 거리감각에 왜곡을 일으키기 때문에 조심했어야 하는데…. 
   순간 묵직한 파열음이 들렸다. 얼음이 갈라졌다. 발밑이 꺼졌다. 아픈 냉기가 하반신에 느껴졌다. 내 몸이 대책 없이 빨려 내려갔다. 나의 핫셀과 함께.
   그러다 죽겠다 싶었다. 얼음 밑으로 머리가 내려가면 끝이었다. 양팔을 쫙 뻗었다. 얼음과 얼음 사이에 몸을 간신히 걸쳤다. 팔꿈치로 버티며 온 힘을 다해 기어나왔다. 영화에서 무음 처리된 장면처럼 처음엔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잠시 후에야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 
   “너는 꼭 왜 이러니?” 
   걱정하는 많은 소리를 뚫고 힐난하는 그놈의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그 후 난 그를 보지 않았다. 
   시리도록 젖은 몸 위에 누군가 건네주는 외투를 두르고 얼음 호수를 빠져 나왔다. 곧장 서울로 왔다. 비닐로 싼 핫셀을 한시라도 서둘러 카메라 수리전문점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뿐. 경포호는 바다 옆 짠물이라 모두 분해하여 특수처리해야 한다. 최소 50만 원 수리비에 제대로 다시 소생시킬 수 있을지 확신도 없다고 했다. 멍한 비현실적 상황.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지도교수님을 찾아가 다짜고짜 장학금을 달라고 했다. 갑자기 장학금을 줄 수는 없지만 도와주시겠다고 했다. 큰 일 날 뻔한 제자가 안쓰러우셨나 보다. 수리점에 전화를 걸어 내 딱한 사정을 설명하며 선처를 부탁하셨다. 수리비가 반으로 내려갔다. 25만 원, 딱 내 한 달치 약사 월급이었다.
   그렇게도 용을 썼지만 결국 핫셀과는 영원한 이별. 제대로 작동되게 고쳐지질 않았다. 수리점에서는 교수님 얼굴을 봐서 내 고장 난 핫셀을 새 미놀타 카메라로 바꿔 주겠다고 선심 쓰듯 말했다. 난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끄덕였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놀타는 손도 안 대고 있다. 그 후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스무세 살 겨울에 첫 남자친구와 전재산이었던 핫셀을 동시에 잃었다. 사진작가로서의 꿈도 접었다. 반면 얼음물 세례는 나를 번쩍 깨어나게도 했다. 이미 소진된 관계란 걸 알고 있었으나 결론 맺지 못한 두 가지를 동시에 끝냈던 것이다. 우선 내가 어떤 남자를 만나야 행복할지도 알게 되었다. 그런 순간에 ‘괜찮아?’ 하며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반쪽이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난 사진작업을 접은 대신 미술사학 이론으로 전공 방향을 돌렸다. 예술가는 영혼의 귀퉁이가 접혀있는 사람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걸 펴려고 안간힘을 다할 때 작품이 나온다고 했다. 난 한 귀퉁이가 접혀 있지 않은 듯하였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는 생각하는 과정을 들여다보고 비평하는 것이 훨씬 흥미로웠다. 당시 제대로 사진비평을 공부한 사람이 없었다. 내가 그 길을 가기로 했다.
   이제 나의 운명이 나를 더 이상 얼음 밑으로 빠뜨리지 말고 좀 살살 다뤄주길 바란다. 하지만 아니어도 어찌하리. 또 차가운 껍데기를 녹여 내다보면 그 안에 행운이 옹골지게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래서 인생은 살아보지 않고는 그 진면목을 알 수가 없다.
   얼음 호수에 빠지던 날, 나는 소중한 두 가지를 잃었지만 그 둘을 합한 것보다 더 소중한 깨달음을 거머쥐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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