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가는 길     -    고한철


   산은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 준다. 어떤 산행 계획이 세워지면 그때부터 마음이 설렌다. 부푼 기대와 함께 무사한 산행을 기원한다.
   거칠고도 광활한 산맥, 히말라야 중부에 줄지어 서 있는 풍요의 여신인 안나푸르나로 떠났다. 인천공항에서 만난 동료들은 카트만두에 도착한 다음 날 관광도시 포카라로 향했다. 그곳에서 차량이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마을까지는 버스와 지프로 이동하였다.
   도보 여행이 시작되는 곳에서 첫 투숙지가 위치한 산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계단식으로 이어진 다랭이논을 사이에 두고 산골 마을이 나타난다. 날씨가 맑아 멀리 안나푸르나 남봉과 히운출리의 하얀 봉우리가 펼쳐진다.
   이번 산행의 목표지점까지 오르려면 하루에 걸어야 하는 계획된 거리가 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험난한 길을 엿새 동안 걸어야 한다. 일행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몇 개월간의 훈련이 이어졌다. 그 결과 이번 산행에 오르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산과 친하게 지낸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현지 가이드가 맨 앞에서 천천히 우리를 인도하였다. 휴식을 취할 때마다 고산병을 예방하기 위해 물도 조금씩 마시며 체력을 안배하라고 했다.
   네팔의 열악한 항공기 사정으로 카트만두에서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첫날밤을 보낼 숙소에는 어둠이 내린 뒤에 도착했다. 산장은 여건이 좋아 잠자리에 불편함이 없다.
   첫 숙소인 해발 2,170m의 촘롱(Chomrong)마을은 네팔의 여러 종족 중 하나인 구릉 족의 터전이다. 우리와 닮은 구릉 족은 몽골계 혈통으로 안나푸르나의 협곡 비탈진 곳에 빽빽하게 계단식 밭을 일구어 왔다. 특유의 친화력과 생활력으로 삶을 일궈 온 구릉 족은 순박한 웃음을 여행자들에게 건넸다. 그곳에는 한국어 간판도 있을 만큼 한국 여행자가 많이 찾는 곳이다.
   촘롱에서 시누와(Sinuwa)까지는 깊은 협곡을 지나는 산행이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걷다 보니 계곡의 하부와 경사진 길을 넘고 오르기를 반복한다. 고도가 높아 갈수록 숨은 막혀 왔지만 믿을 것은 오직 나의 정신력과 발뿐이다. 길가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가 우리에게 웃음을 나눠준다. 무딘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진다.
   안나푸르나의 산행은 힘든 곳이다. 아침에 숙소를 떠나면 온종일 걷는다. 도보 여행의 기점인 마을마다 자리 잡은 호텔 겸 레스토랑인 산장은 여행자들의 숙소가 되어 주었다. 현지인에게는 소득이 되는 생활공간이면서 여행자들에게는 몸을 누이고 내일을 준비하는 곳이 된다.
   산행할 때에는 등반객의 인원에 따라 나라에서 지정한 포터와 요리사들이 언제나 동행한다. 이들은 지정된 짐을 나르고 등반객의 식사를 책임진다. 3,000m에 진입하자, 고산병 영향으로 피로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약을 먹고 천천히 걸으며, 참고 걸어야 한다. 최종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가까운 3,700m에서 하루를 쉬었다.
   안나푸르나의 깊어가는 밤하늘 아래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본다. 영롱하게 빛나는 별들이 내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내가 누워있는 이곳은 지상에서 하늘과 가까운 곳이다. 옛날 사람도 이곳에 왔을 테다. 그 훨씬 이전에는 어쩌면 신과 동물만 어우러져 살던 지상낙원이었을 것이다. 이런 험지에 수많은 사람은 찾아와 무엇을 바라고 빌었을까.
   날이 밝았다. 산행의 최종 목적지이며 성지聖地라 불리는 해발 4,130m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도전하는 자만이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과 마음에 담고 간다. 마침내 고대하던 꿈의 자리에 섰다. 세상 천하가 내 발아래 있는 듯했다. 목표지점을 정복하기까지는 어려웠던 시간을 이겨냈기에 가능한 일이다. 높고 험한 산일수록 넘어야 할 장애물도 많이 만나게 된다.
   감명 깊게 맞이한 성지이다. 요동치는 벅찬 감동을 오래오래 눌러두었다. 여러 차례 높은 산을 정복해 보았지만, 이번처럼 가슴 뭉클한 기억은 없다. 산행하게 된 기회도 행운이었고 무사히 정복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혼자서는 엄두를 못 낼 일이다. 다시 찾아오겠다는 기약을 하기가 어려운 곳이라 생각한다. 안나푸르나 남봉과 마차푸차레 등 만 년 설산이 가까이 와 있다. 거대한 설산 군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양지바른 언덕에는 대한민국의 자랑 박영석 대장과 제주 출신 신동민 산악인의 추모비가 서 있다. 그들도 처음에는 추모비로 남을 것은 예상도 못했으리라. 영혼이 머무는 추모비 앞에 머리 숙여 삼 배 올렸다. 한국 산악인의 도전정신을 가슴에 담았다.
   이루어냈다는 성취감을 뒤로하고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가파른 길과 비에 젖은 돌길은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늘 조심해야 했다. 온 정신을 집중하여 걸었다. 촘롱까지 이어지는 2,300여개의 돌계단을 오를 때는 휴식을 취하며 걸어도 힘이 든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줄 수도 없이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비 내리는 촘롱 산장에서 마지막 밤을 위한 만찬이 있었다. 그간 우리에게 도움을 준 고마운 분들과 함께하는 추억의 자리였다. 요리사는 현지 음식도 몇 가지 만들었지만 대부분 한식이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안전한 산행이 되었다. 주어진 일에 보람을 느끼며 건강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내가 만나왔던 수많은 이야기는 대자연에서 비롯됐다. 자연의 장엄함 앞에서 마음이 겸허해진다. 인생의 도전도 발로 내딛는 것 말고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나 자신과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 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천천히 걸으며 생각하니 지나온 삶의 여정도 힘들었다. 이런 험한 산길처럼 힘들게 오르고 또 올랐던 것이 지금은 보람으로 남겨졌다.
   긴 여정에서 만났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길 위에서 많은 것을 일깨워 준 시간이었다. 제2의 인생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튼튼한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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