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이양하(李敭河 1904-1964)는 평남 강서(江西)출생으로 수필가, 영문학자. 평양고보, 일본 제삼 고등학교를 거쳐 동경 제대 영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희전문과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한국 수필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현대 수필의 경지를 개척하여 수필을 주변적인 글에서 독자적 장르로 확립하는데 앞장섰다. 그의 광복 이전의 작품들은 찰스 램의 수필적 경향을 따른 주관적이고 명상적인 서정수필이다. 시대적으로 불운했던 배경의 소산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많은 문인들이 조선문인협회를 결성하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협조하던 세태에서 씨는 끝까지 창씨를 거부하고 학도들의 출정을 강요하거나 장려하지 않았다.
그 시절 그의 글은 자연을 사랑하고 영원을 추구하고 예술을 찬미하여 불운한 시대적 상황에서 벗어나려 한 고독한 도피이기도 했다.
저서로는 광복 이전의 작품을 묶은 {이양하 수필집}(1947)과 그 이후의 작품을 묶은 {나무}(1964)가 있다.
[신록예찬]은 첫 번째 수필집에 수록된 대표작중의 하나이다. 신록을 소재로 하여 자연의 혜택과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세속적인 삶의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아름다움의 서술과 묘사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고 점층법의 사용, 열거와 비유 등이 돋보이고 전체적으로 단아한 분위기를 이룬다.




신록 예찬 / 이양하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4시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 중에도 그 혜택이 가장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에 녹엽(綠葉)이 우거진 이 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오늘도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우리 연전(延專) 일대를 덮은, 신록은 어제보다도 한층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있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나의 문법이 끝나자 큰 무거운 짐이나 벗어놓은 듯이 옷을 훨훨 털며 본관 서쪽 숲 사이에 있는 나의 자리를 찾아 올라간다. 나의 자리래야 솔밭 사이에 있는 겨우 걸터앉을 조그마한 소나무 그루터기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오고 가는 여러 동료가 나의 자리라고 명명하여 주고 또 나 자신이 소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솔잎 사이로 흐느끼는 하늘을 우러러 볼 때 하루 동안에도 가장 기쁜 시간을 가질 수 있으므로 시간의 여유있을 때마다 나는 한 큰 특권이나 차지하는 듯이 이 자리를 찾아 올라와 하염없이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물론 나에게 멀리 군속을 떠나 고고한 가운데 처하기를 원하는 선골(仙骨)이 있다거나 또는 나의 성미가 남달리 괴팍하여 사람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甲男乙女)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사람으로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 살고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이 있고 황홀한 신록이 모든 산 모든 언덕을 덮는 이 때 기쁨의 속삭임이 하늘과 땅, 나무와 나무, 풀잎과 풀잎 사이에 은밀히 수수(授受)되고, 그들의 기쁨의 노래가 금시에라도 우렁차게 터져 나와 산과 들을 혼들 듯한 이러한 때를 당하면, 나는 곁에 비록 친한 동무가 있고 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자연에 곁눈을 팔지 아니할 수 없으며, 그의 기쁨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사람이란―세속에 얽매여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머니의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 또는 오욕칠정(五慾七情)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는데 마음의 영일(寧日)을 갖지 못하는 우리 사람이란 어떻게 비소(卑小)하고 어떻게 저속한 것인지 결국은 이 대자연의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조화를 깨뜨리는 한 오점 또는 한 잡음밖에 되어 보이지 아니하여 될 수 있으면 이러한 때를 타 잠깐 동안이나마 사람을 떠나 사람의 일을 잊고, 풀과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한가지로 숨쉬고 느끼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사실 이즈음의 신록에는 우리 사람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앉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모든 티끌―나의 모든 욕망과 굴욕과 고통과 곤란―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다음 순간, 별과 바람과 하늘과 풀이 그의 기쁨과 노래를 가지고 나의 빈 머리에, 가슴에, 마음에 고이고이 들어앉는다. 말하자면 나의 흉중에도 신록이요, 나의 안전(眼前)에도 신록이다. 주객일체(主客一體) 물심일여(物心一如), 황홀하다 할까, 현요(眩耀)하다 할까,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장무애(無障無 ), 이러한 때 나는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가진 듯이 행복스럽고, 또 이러한 때 나에게는 아무런 감각의 혼란도 없고 심정의 고갈도 없고, 다만 무한한 풍부와 유열(愉悅)과 평화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때에 비로소 나는 모든 오욕(汚辱)과 우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고, 나의 마음의 모든 상극과 갈등을 극복하고 고양하여 조화 있고 질서 있는 세계에까지 높인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러기에 초록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淸濁)이 업다. 가장 연한 초록에서 가장 짙은 초록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 그러나 초록에도 짧으나마 일생이 있다. 봄바람을 타 새 움과 어린잎이 돋아나올 때를 신록의 유년이라 하면, 삼복 염천 아래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짓는 때를 그의 장년 내지 노년이라 하겠다. 유년에는 유년의 아름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하고 선택할 여지가 없지마는,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즈음과 같은 그의 청춘 시대―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을 띠는 시절이라 하겠다. 이 시대는 신록에 있어서 불행히 짧다.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혹 2,3주일을 셀 수 있으나,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불과 3,4일이 되지 못하여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이 짧은 동안의 신록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참으로 비할 데가 없다. 초록이 비록 소박하고 겸허한 빛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때의 초록은, 그의 아름다움에 있어 어떤 색채에도 뒤서지 아니할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고귀한 순간의 단풍 또는 낙엽송을 보라. 그것이 드물다 하면 이즈음의 도토리, 버들 또는 임간(林間)에 있는 이름 없는 이 풀 저 풀을 보라. 그의 청신한 자색(姿色), 그의 보드라운 감촉, 그리고 그의 그윽하고 아담한 향훈(香薰). 참으로 놀랄 만한 자연의 극치의 하나가 아니며, 또 우리가 충심으로 찬미하고 감사할 만한 자연의 아름다운 혜택의 하나가 아닌가!
―韓國隨筆文學大全集, 汎潮社 발행

 
* 註解

선골(仙骨): 신선다운 품격.
갑남을녀(甲男乙女): 갑이란 남자와 을이란 여자의 뜻으로, 평범한 사람들.
오욕칠정(五慾七情): 불교에서 말하는 재물, 색, 음식, 명예, 수면에 대한 다섯 가지 욕망과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 즉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汚), 욕(慾).
현요(眩耀): 눈부시게 빛남.
무장무애(無障無碍):아무런 장애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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