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 곁에서 / 오금자

 

 

어두운 그림자가 겨울나무 위에 드리워진다. 거리에 가로등이 하나둘 들어오면 가슴에 못다 한 이야기들이 그리움으로 흩날린다. 바람 속에 흔들리는 겨울나무를 위로하듯 가만히 안아본다.

 

나무는 잎을 떨군 앙상한 모습이다. 여기저기 파이고 갈라진 상처는 고통스럽게 보인다. 한세상을 살아오면서 나이테를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가 있었을까. 세찬 비바람에 속살이 터져 가면서도 어린 가지를 지키려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혹독한 추위에도 뿌리를 땅에 딛고 서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진눈깨비가 날리더니 금세 함박눈으로 변한다.

 

나뭇가지 위에 소복이 쌓이는 눈이 나무의 아픈 상처를 덮어주고 있다. 오랜 시간 저 자리에 서서 희로애락을 품었던 나무다. 어린 새싹이 자라서 저렇게 큰 나무가 되는 삶이 어찌 그리 쉬운 일이었을까. 비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는 부러졌고 온몸은 상처투성이다. 그렇지만 어디선가 예쁜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고 행복한 보금자리를 꾸려 주길 원했다. 철없는 새끼 새들은 어미가 물어다 준 먹이를 먹고 자라면서 마냥 행복했다. 겨울나무는 속살이 터지지 않으면 큰 나무로 자랄 수 없나 보다. 풍파의 세월 속으로 파고드는 칼바람에 비틀거렸다.

 

병상에 누운 그이는 나를 보고 웃고 있지만, 삭풍 앞에 선 겨울나무처럼 앞날에 대한 두려움만 가득하다. 병원 신세를 지고부터 작별의 시간은 점점 다가온다. 약속한 백년해로도 영원히 곁을 지켜주겠다던 맹세도 다 부질없는 일이다. 세상에는 영원한 삶도 영원한 나무도 없다.

 

삶과 죽음이 차이는 무엇인가. 죽음은 인생의 종착역이요, 모든 것이 끝나는 일이다. 이승에서 맺은 인연이 여기가 끝인가 보다.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으로 마음은 텅 비어 있다. 삶을 마감하는데 한마디 작별 인사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다.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남편 뒤로 검은 그림자가 어른대고 있다. 식어가는 손을 잡고 울음만 삼켰다. 나는 어둡고 적막한 병실에 홀로 남아 절규했다. 그 순간에 삶과 죽음은 서로 갈라져 작열하고 있었다.

 

겨울나무는 한겨울이 오면서 푸르던 잎새를 모두 떨구고 있지만, 한때는 당당하게 풍성한 잎을 자랑하며 뽐냈다. 너른 품을 내어주며 오가는 이들의 고단한 심신을 달래주는 안식처였다. 생명을 다하고 떠나는 사람이 어찌 세상을 원망하고 싶지 않겠는가.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을 거역할 수 없어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하다. 당당하던 젊은 날이 그리워 돌아가는 길이 더 막막할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찌 봄날만 있겠는가. 겨울나무는 한겨울 눈보라 속에서도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몇 년 동안 혹독한 겨울 속에서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서슬 퍼런 바람에 쓰러져 일어설 수 없는 일은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벌판에 서 있는 것처럼 몸과 마음은 갈가리 헝클어졌다. 눈물방울 하나하나를 구슬로 엮어서 떠나는 그에게 드리고 싶다. 눈물겨운 시간을 모두 보내고 남은 마음의 끝자락은 붉기만 하다.

 

신은 나의 편이 아니었다.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는 애달픈 기도를 들어 주지 않았다. 이승에서 드리는 마지막 미음(米飮)을 남편이 입속으로 넣으며 눈물을 삼켰다. 아이들이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깜깜한 시간 속에 어디로 가야 할지 불안이 엄습해온다.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는 작별의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 모든 것이 멈추었다. 생명의 끝에서 어둠이 나에게 다가와 자꾸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제 곧 나도 사라지고 그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지고 오직 울음소리만 존재하는 그런 순간이 올 것이다. 어디선가 붉은 황혼이 떨어지는 고요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고요 속에서 비로소 삶과 죽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듯했다.

 

나무가 부럽다. 혼자만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살아왔기에 이별의 슬픔은 없다. 너른 품을 가지고 있으니 몰아치는 비바람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안으로만 숨어들었던 가슴에는 시린 바람이 몰려와 서럽다. 혼자 걷는 길 위에는 찬 바람만 불어온다. 되돌아보니 저만치 한 그루 나무가 떠나간 사람같이 나에게 다가온다.

 

남편과 함께 자주 걸었던 길에 서 있던 나무를 가만히 안아본다. 쿵쿵대는 심장 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서로의 흐느낌을 느낀다. 나무는 언제까지 곁에 있겠다는 듯이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 소곤소곤 속삭이듯 들려주는 한마디 위로가 평온하다. 하늘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듯 눈이 펑펑 내린다. 눈송이는 나무 위에도 내 머리 위에도 살포시 내려앉는다. 눈 위에 그의 이름을 새겨본다. 기억해야 할 것들이 아직은 남아 있어 겨울나무 곁을 떠나지 못한다.

 

앙상한 겨울나무에서 마지막 남은 잎새가 툭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떠나는 것은 언제나 슬프다. 마지막 잎새, 마지막 열차, 마지막 사람. 나는 다시 봄을 기다리며 살기로 했다. 겨울나무는 죽은 듯이 잠자고 있다가 봄이 오면 불현듯 초록빛 생명을 준다. 나무는 초연한 것처럼 천천히 상처를 녹여내는 중이다. 이제는 이 우울한 겨울에서 벗어나고 싶다. 인생의 행복은 봄날의 새싹처럼 다시 돋아나는 것이다. 나에게도 언제 봄이 오기나 할 것인지.

 

이제 오롯이 혼자 살아가야 하고 감당해야 할 일들만 남아 있다. 떠나는 자는 말이 없고 슬픔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때로는 슬픈 노래가 위안이 될 때도 있다. 당신은 노을 속으로 사라져 가고 나는 여기 남았다. 찬바람을 머금은 채 드리워졌던 안개도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회한의 시간은 물결처럼 일렁이고 그 자리를 그리움이 채운다. 죽어가던 겨울나무에도 마침내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새들이 지저귈 것이다. 나에게도 어둠이 지나가고 연둣빛 봄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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