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빵에 관한 기억 / 박월수

 

어릴 적 동네 초입에는 초가지붕이 나지막한 점방이 있었다. 얇은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면 툇마루에는 알록달록한 과자가 가득했다. 일곱 살 초겨울 무렵이 되자 점방 귀퉁이에 국화빵틀이 놓여졌다. 신기한 물건이 들어왔다는 소문은 동네 꼬맹이들에게로 삽시간에 번져갔다.

우르르 몰려갔을 땐 고운 매무새의 주인 할머니가 햇살 좋은 마루 끝에 앉아 빵을 굽고 있었다. 기름 솔로 문지른 후 양은 주전자에 담긴 반죽을 붓고 팥소를 넣는 모습은 재미난 구경거리였다. 따로따로 뒤집어지는 빵틀 안에서 풀빵은 노릇하게 구워져 나왔다. 미닫이문 밖에 붙어 서서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노라니 입안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고소한 냄새는 급기야 엉성한 문틈을 비집고 나와 주머니가 빈 아이들을 부추겼다.

몇몇 아이들은 마주하고 앉은 대폿집으로 어른들을 조르려고 달려갔다. 떼쓰기에 성공한 아이들은 국화꽃이 핀 빵을 사 들고 또래들이 보란 듯 으스대며 먹었다. 막걸리 판에는 아버지도 끼어있을 터였지만 나는 손을 벌리러 가지 않았다. 버릇없는 아이라고 혼이 날 게 분명했다.

점방 유리문 밖에서 저물도록 빵 굽는 냄새에 취해있던 중이었다. 눈앞에 그림자가 짙어지더니 불콰한 얼굴의 아버지가 나타나셨다. 내 앞에 투박한 손을 내밀며 딱 한 마디를 하셨다.

“옛다, 풀빵 사 묵거라.”

아무래도 꿈을 꾸는 게 분명했다. 여태 내 손에 돈을 쥐여 주며 무얼 사 먹으라고 한 적이 없었다. 비틀거리듯 걷는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그토록 먹고 싶던 국화빵을 사서 입 안에 넣었다. 한 번도 포근하다고 느껴본 적 없던 아버지가 따뜻하다고 생각 키울 정도로 세상에 없는 맛이었다. 지금껏 먹어 본 풀빵 중에 그날 먹은 빵만큼 맛있는 건 아직 없었다.

아버지는 세월이 준 선물 같은 흰 눈을 머리에 이고서도 언제나 여전하셨다. 다정함과는 척을 지고 완고함과는 이웃하신 듯 가족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으셨다. 출가한 고명딸 집에 어쩌다 들렀다가도 서둘러 일어나셨다. 좋아하는 소주 두어 잔에 무른 안주 한 점을 들고는 서둘러 털털거리는 자전거에 오르곤 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란히 딸네 집에 두어 번 주무신 적이 있다.

“야야, 이적지 괴안타가 각중에 이기 무신 일인가 모리겠다. 너거 아부지가 숭악한 암이라 카더라. 너무 늦어가 인자 우예 해 볼 수도 엄따 카더라.”

평생을 마당 있는 집에서 눈을 뜨고 새벽이면 당신의 논밭을 둘러보는 일로 기쁨을 누리던 아버지께서 우리 집엘 오셨다. 상자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고층 아파트에서 남은 생 얼마를 딸과 함께 지내기 위해 갑갑증도 견디기로 하신 것이다. 하지만 아침이면 일터로 나가야 하는 나는 두 분과 오래 있어 드릴 수가 없었다. 특별하다 싶은 찬을 준비해서 상을 차려드리는 게 전부였다. 두 분만 덩그러니 남은 낮 시간이 얼마나 적적할지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 삼아 헤아려볼 겨를도 없었다.

어느 밤 퇴근 무렵, 남편은 아파트 앞 붕어빵 손수레 앞에서 멈추어 섰다. 어른들 종일 심심했을 텐데 입이라도 다시면서 말씀 나누게 풀빵을 사다 드리자고 했다. 남편의 말이 고마우면서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거리에 파는 밀가루 음식이 아버지 병에 좋을 리 없을뿐더러 두 분은 평소에 주전부리를 꺼리셨다. 뜻밖에도 두 분은 사위가 사다 드린 붕어빵을 참으로 탐스럽게 드셨다.

“마딧따. 참 다다.”

몇 번이고 그러셨다. 붕어빵이 나를 철들게 했다. 내 입에 맛있으면 부모님도 맛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날 이후 온갖 먹을거리를 사다 나르고 수시로 늦은 밤참을 주문했다. 그러나 모처럼의 효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더 이상 드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한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서러운 풀빵은 그날 두 분과 함께 먹었던 붕어빵이다.

찬바람이 부는 이맘때 풀빵 몇 봉지 사서 부모님을 찾아뵙는 일은 가장 작은 효도의 시작이 아닐까. 더 늦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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