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야乙夜 / 송귀연

 

 

타그락 타그라 터얼컥! 가마니 짜는 소리에 잠을 깬다. 걸대엔 세로 방향으로 새끼줄이 촘촘히 끼워져 있다. 어머니가 바늘대에 짚 두매를 맞장구치자 아버지가 바디를 힘껏 내리친다. 씨줄을 교차하며 짚 넣기를 반복하니 가마니가 뚝딱 완성된다. 머리맡의 등잔불이 꺼질 듯 흔들리고 마구간에선 누렁이가 콧김 내뿜는 기척이 난다.

옛날 어른들은 종일 고단한 일을 하면서 밤엔 시간을 쪼개어 가내부업을 했다. 할머니는 물레를 저어 실을 잣고 베를 짰으며, 아버지, 어머니는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았다. 방안엔 늘 먼지와 지푸라기가 풀풀 날렸다. 어린 우리는 초저녁부터 잠에 곯아떨어졌다가 한잠 푹 자고 나면 대체로 열 시 정도에 이르렀다. 어른들은 그제야 부스럭거리며 하던 일을 접고 자리에 들었다. 아버지는 짠 가마니를 쇠바늘로 꿰매어 오일장에 내다 팔았다.

을야는 밤 열 시 전후를 이르며 이경이라고도 한다. 농촌의 하루는 늘 분주하다. 동이 트기 전 새벽부터 일어나 그날 해야 할 일들을 챙긴다. 과수원 가지치기며, 사과 수확 후 감사 비료라 해서 나무마다 골고루 거름주기 등을 한다. 종일 농사일을 하다 보면 언제나 해는 짧고 어느새 저녁이 되고 만다. 뒤이어 가족의 식사를 챙기고 설거지를 끝내고 나서야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다. 이때쯤 낮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반추하며 매끄럽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후회와 새로운 다짐을 하다 보면 밤이 이슥해져 이경에 이르는 일이 다반사다.

밤 열 시는 하루를 온전히 마무리 짓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릴 적에 통금사이렌이라는 것이 있어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도 열시를 넘어서면 약속이나 한 듯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그래야지만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한 울타리 안에 들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레 모든 일을 접었다. 그럴 땐 을야는 족쇄처럼 불편하고 귀찮은 것이었다.

추석날 밤의 세시풍속은 신라의 유리왕 때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아녀자들이 며칠 새벽을 큰 부部의 뜰에 모여 편을 갈라 길쌈을 하게 했는데 이경이면 파하게 했다. 여기에 노래와 춤이 곁들여지게 했으니 밤이 새도록 흥이 가시지 않았을 터. 적당한 시간에 가배놀이를 파하게 한 왕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듯하다.

나에게 열시는 사색의 시간이다. 이를테면 하루를 접는 마무리단계이면서 글에 대한 생각이 무르익어 차오르는 때이다. 소란스럽던 낮의 여운이 사위면서 스펀지에 물 스미듯 어둠이 서서히 번져나간다. 가끔씩 앞산에선 고라니가 짝을 찾는 소리며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달빛에 앙상한 나신을 드러낸 인동초가 바람에 몸을 흔들어대는 것도 이때다.

을야는 한껏 무르익은 과육의 껍질이 터질 것처럼 벌어지려는 정점의 순간이기도 하다. 풋감이 실하게 익어가면서 떫은맛에서 단맛으로 결을 달리하기 위한 커밍아웃을 하는 시점이랄까? 할머니는 화롯가에 둘러앉은 우리들에게 군밤이며 고구마를 구워 먹였다. 시커멓게 그을음 묻은 얼굴을 쳐다보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깔깔거렸다. 마땅한 군것질이 없을 땐 동치미로 출출함을 달래기도 했다.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뒤란의 항아리 속 동치미 가져오기는 가위바위보로 순번을 정했다.

할아버지는 저녁이면 구수한 입담으로 종종 옛날 역사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밤은 깊어가고 우린 무릎을 세우고 귀를 쫑긋 모았다. 조선의 야담으로 '성종과 문지기' 얘기며 월산대군부인 박씨, 어사 박문수, 단종의 비화 등이었다. 그런 날 밤이면 가슴이 아릿하기도 충만하기도 해서 잠을 못 이루었다. 특히 송씨부인이 아침저녁 큰 바위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 영월을 향해 절을 하며 통곡했다는 얘기를 떠올리면 지금도 명치끝이 아릿해진다.

우리 집은 일 년에 제사를 열두 번씩 지내는 종갓집이었다. 아침부터 숙모며 종숙모까지 친척들이 모여 제기를 닦고 전을 부쳤으며 두부를 짜고 떡을 찌느라 온종일 부산했다. 밤 열시가 넘어서면 아버지는 제사상을 들인 후 지방을 썼다. 등잔불 대신 양쪽에 촛불을 밝혀 조상이 오시는 길을 훤히 밝혔다. 조상에 대한 제례는 경건한 의식이었다. 큰소리도 내지 말라며 떠드는 우리들을 나무랐다. 제관들은 풀 먹인 도포를 두르고 한사람씩 모여들었다. 음복 생각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느라 잠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사방이 고요에 휩싸인 시간, 홀로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며 생각에 잠긴다. 시침과 분침이 나란히 열시를 넘어섰다. 몸은 나른하지만 머리는 더 맑아진다. 나는 또 머나먼 해역을 거쳐 가까스로 항구에 닻을 내리는 배처럼 편안해진다.

어디선가 타그락 타그락 터얼컥! 가마니 짜는 소리가 들려온다. 쫑이와 솔이가 또 달을 쳐다보며 실없이 컹컹댄다. 이따금 세한의 바람이 창을 흔든다. 겨울밤이 오디처럼 까맣게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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