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외로움 / 류창희 - <책만 보는 바보>를 읽고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

겨울 햇살 같은 아쉬운 시간이 있었다. 검은 뿔테안경을 끼고 <러브 스토리>의 여자 주인공처럼 지성인다운 연애를 하고 싶었다.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영화를 보던 그 당시 나는 절박했다. 취직이 우선이었다.

주산학원에서 손놀림은 빨랐으나 당최 숫자에 약한 나는 고통스러웠다. 설상가상으로 폐에 하얀 찔레꽃이 만발하여 붉은 찔레 열매를 토해냈다. 나에게 지성(知性)은 낭만이었다. 책이라도 실컷 읽을 수만 있다면 하얀 눈밭에서 뒹굴며 연애하다 죽어도 좋을 성싶었다. 영화 속 여주인공은 도서관 사서였다. 그때 나는 사서를 꿈꿨다.

이덕무 그도 규장각(奎章閣)의 사서였다. 세상에 나만큼 복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길음동 육교 밑의 작은 책방을 드나들며 물래 한쪽씩 책을 읽던 가난한 소녀가 이렇게 책에 나올 글까지 쓰게 되니 출세치고는 사대부가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이나 다름없다. 그 필연의 이름이 ‘청복(淸福)’이다. 청복은 내가 선택한 정신적인 가난이다. 군자는 회덕(懷德)이라 했던가. 덕을 그리워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청렴한 복이다.

나는 지나치리만치 성정이 상냥하다. 처음 보는 이들은 간혹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명랑모드라 해서 꼭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명랑하지는 않다. 오히려 우울한 부분에 베일을 치느라 일부러 반음을 높일 때가 많다. 성품이 달그림자처럼 조용한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을 몹시 낯설어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덕무 그의 외로움도 알 것 같다. 사회적 출신성분이 ‘우울모드’다. 그를 밝은 성격으로 이끄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책이다. 책을 보며 마음에 등불을 켜는 시간이 그의 실존이다. 허구한 날 좁은 방 안에 틀어박혀 세월을 허송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날마다 책 속을 누비고 다니느라 숨도 가쁘고 가슴도 벅차고 다리도 뻐근했다고 한다.

“기분이 울적한 날이면 나는 조용히 앉아 논어를 읽곤 했다. 그날 밤 나는 분명히 나를 위해 이불이 되어준 <한서>의 몸놀림을 보았고, 제 몸으로 바람을 막아 보라는 <논어>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덕무의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에서처럼 심성의 따뜻함을 지키는 것이 나의 자존감이다.

나는 시립도서관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논어를 강독하고 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덧 18년이 되었다. 강이 산이 되었는지, 산이 강이 되었는지 지적도를 뗄 문서가 없으니 그건 잘 모르겠다.

나는 옳은 선비도 아니요, 감히 학자는 더욱 아니다. 부박한 내가 어찌 그 옛날 춘추전국시대 성인의 말씀을 학문으로 전달하겠는가. 논어를 함께 강독하면서 그저 내가 앉을 자리, 설 자리, 나설 자리, 들어설 자리를 구별하여 한 구절씩 또박또박 읽는다.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본문은 <논어> 책 안에 다 있다. 내가 하는 일은 내 식구들과 내 이웃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그런 문구가 여기에 있다고 안내만 하는 내비게이션 역할이다. 결국, 인문학은 사람 사는 이야기다.

나는 어떤 일 앞에 곧잘 “옳거니! 이 일은 내게 딱 맞는다.”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실제로 에너지가 나온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한다. 때론 펄펄 뛰는 고등어가 되고, 안간힘을 쓰며 일하는 개미가 되며, 재주넘는 다람쥐가 되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원숭이가 되어 매주 매일 논어를 소리 내어 읽는다.

이덕무가 백탑 아래서 벗들과 지내듯, 수강자들을 만난다. 인생 뭐 있나? 뭐 있다! 서로 인정받고 인정할 때 고래도 춤춘다. 어느 장소에서건 민낯의 가장 나다운 솔직함으로 임한다. 내 입으로 글을 읽어도 듣는 것은 나의 귀요, 내 손으로 글을 써도 보는 것은 나의 눈이니, 오로지 내가 나를 벗 삼던 ‘간서치(看書痴)’ 같은 시절이 내게도 분명히 있었다.

옹색한 환경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했던 세월이 준 선물은 바로 마주 앉은 벗들이다.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 이서구 홍재용 박지원이 어디 조선 시대에만 있었을까. 그들의 분신이 오늘 내 앞에 있다.

나는 호걸다운 바둑이나 장기는 어디 갔던지, 요즘의 노래 춤 화투 놀이 등에는 신바람이 없다. 강의실 안에는 봄날의 신록처럼 싱그러운 여대생, 깎아지른 절벽처럼 강파른 청년, 눈길이 햇솜 같은 선배, 큰소리로 질문하는 어르신, 손가락 하나로 검색의 달인들이 시간마다 스마트폰을 들고 찍으며 확인한다.

나는 그분들을 보며, 차이와 다름을 배운다. 한결같이 꽃시(詩)의 언어로 꽃씨를 심어주는 해인 수녀님, 오직 사랑, 노라, 빙호, 우아미, 한 번도 만난 적 없어도 스승으로 삼는 한시 미학 선생,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라는 나탈리 골드버그 같은 임들이 나의 버팀목이다.

훗날, 글을 읽다가 가끔 벗이 찾아와 주면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세월을 보내고 있어도 마음이 편안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내게 있어 애지중지 글 상자를 전해주는 유득공은 누구고, 따스한 눈빛으로 지켜봐 주는 박지원은 누구인가. 부족한 덕으로 말미암아 소중한 나의 벗님들을 잃을까. 늘 노심초사한다. 그래, 이제는 겁내지 말자.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누가 나와 노닐어 주겠는가.

공자, 가라사대.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子曰 德不孤 必有隣 -이인편

 

나는 어떤 벗일까. 아침 창가에 살며시 스며들어 책상 위를 환하게 비춰주다가, 석양에 툇마루의 손바닥만 한 온기라도 남겼으면 좋으련만….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봄 햇살처럼 나는 따뜻한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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