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팔다 김아인

  

가수 유지나 씨와 MC 겸 코미디언인 송해 씨가 노래를 부른다. ‘아버지와 딸이라는 제목이다처음 듣는데도 리듬을 만난 가사가 찡한 울림을 준다여기서 훌쩍저기서 훌쩍아침부터 방청객들이 눈물바람을 한다. “내가 태어나서 두 번째로 배운 이름 아버지 가끔씩은 잊었다가 찾는 그 이름 우리 엄마 가슴을 아프게도 한 이름” 대중가요의 매력이 바로 이런 것일까노랫말을 들을수록 마치 내 사연을 모델 삼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진짜 부녀지간보다 더 살갑고 다정해 보인다세상에 엄마를 주제 삼은 노래는 많아도 아버지를 주제 삼은 노래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만들었다는 유지나 씨의 부연설명이 명치끝에 와서 머문다본인도 녹음할 때 눈물이 하도 흘러서 중간에 몇 차례나 쉬었노라고 덧붙인다.

나도 그랬다처음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첫줄을 꺼내기 무섭게 글보다 앞서가는 격한 감정 때문에 뒷글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예순이 코앞이면 기억하는 것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아야 정상일 것이다그런데 어디에 잠복해 있었는지 묵은 기억이 봇물처럼 삽시간에 터져 나왔다북받친 감정들은 슬픔의 부력이 되어 시효 지난 눈물을 길어 올렸다때문에 모니터 화면이 황사를 덮어쓴 듯이 뿌옇고 글자판은 마른 땅에 소나기 내린 자국처럼 얼룩지기 일쑤였다.

술과 노름으로 엄마 속을 어지간히도 썩이신 아버지그런 아버지 탓에 엄마를 너무 일찍 여의었다고 생각하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자랐다엄마 없이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서러움 구덩이였다그러니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건 당연한 일그게 엄마를 대신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라 여겼는지도 모른다차라리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엄마가 살아계셨더라면 이보단 나을 텐데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으로 숱한 밤을 지새우곤 했다.

아버지를 팔기 위해 컴퓨터 앞에서 전을 편다좌판이 아닌 자판이다이제는 내 연륜을 생각해 세련되고 유행에 맞는 신상(新商)을 팔고 싶지만 타고난 깜냥이 이게 다다술꾼노름꾼이런 수식어가 아버지의 전부는 아닐 테지만 아무리 훑어도 다른 물목이 없다당신도 민망하신 걸까꿈에서조차 아무 항변을 안 하신다어쩌다 원하는 만큼 장사가 될 때도 있다그런 날은 더 서럽다입술을 꾹 다문 채 누운 아버지 앞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울부짖던 통곡이 귓바퀴를 흔든다속수무책이 배경으로 남아있는 안방의 서늘한 아랫목이 침묵하고 있다관 값이 없으니 이불에다 말아서 그냥 묻자던 친척 누군가의 말이 허공을 헤맨다그 말의 주인도 주검으로 묻힌 지 오래시퍼런 분노마저 썩어 거름이 된 세월이건만 쓸데없이 좋은 기억력이 기어이 아문 상처를 헤집는다.

술이 밥이던 아버지난 왜 아버지의 밥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을까단 한번이라도 이해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까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이해하고 좋은 밥 사드릴 수 있는데몇 해 전 아버지 유택에다 막걸리를 뿌렸었다그 무렵 멧돼지가 들쑤시고 갔다벌초를 맡아주시는 분이 사토(死土)는 해주셨지만 더 이상 그 알량한 효도마저도 할 수 없게 됐다술이 화근이라면서 묘소 주변에 음식을 진설하지 말라고차리더라도 냄새하나 남기지 말고 말끔히 다 치우라고 충고하셨기 때문이다멧돼지의 천적인 호랑이똥이 효과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방법도 써보았으나 산짐승의 감각을 오래 속일 수는 없었다세상을 잘 만나 아버지의 밥 정도는 대접해 드릴 수 있는데 마음 놓고 막걸리 한 잔 올릴 수 없는 기막힌 운명 아닌가그래도 어쩌랴그날의 황망함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멧돼지 놈을 절대 자극해선 안 된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새 인간이 탄생한다 했던가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일지 모르겠다원망의 자리가 회한으로 바뀌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세월이 흐를수록 밀려오는 죄책감이랄까어떤 빚진 마음과 만날 때면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자고 맹세한다주름 한번 못 잡고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아직 오지 않은 내 전성기를 꿈꿀 수 있는 계기도 된다늦은 꿈을 열정과 눈물과 기도만으로 이룰 수 없어서 상심할 때는 아버지란 이름이 히든카드다유전적인지 세상과 쉽게 타협 못하고 의기소침할 때도 바른 길을 잘 가고 있다는 아버지 말씀이 환청으로 들린다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말을 되새기며 각오를 다지게 한다.

소 등에 앉은 파리가 날갯짓하듯이 추억을 꿰는 동안 프로그램이 끝나고 광고 방송이 한창이다아버지를 파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자기연민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던 20대의 굴레에서 빠져나온다기억은 비행기구름처럼 꼬리가 긴데 까다로운 손님을 만난 듯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느려지더니 뚝 끊긴다모든 이야기가 글이 되는 건 아닌가 보다흥정이 사라진 키보드 위의 손가락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몰라 서성이는 순간 감정과 감정 사이로 이성이 끼어든다워낙 장사 수완이 없지만 오늘따라 쉽게 좌판을 걷지 못한다어느새 햇살이 베란다 깊숙이 들어와 그늘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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