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손의 위상에 관한 형이하학적 고찰 / 최민자

  

 

 

사람의 신체에서 눈과 손처럼 돈독한 사이도 없다. 그림을 그리거나 바느질을 하거나, 물건을 고르고 과일을 깎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눈과 손은 함께 일한다. 눈이 손을 이끄는 건지 손이 눈을 거드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좋은 일 궂은일을 함께 도모하며 먼 듯 가까운 듯 일생을 살아낸다.

 

눈을 최고사령부의 파수병이라 치면 손은 변방의 행동대원이다. 위치로 보나 생김으로 보나 가까운 촌수는 아닐 성싶은데 무슨 연고로 의기투합하여 상부상조를 하게 된 것일까. 둘 다 말단이니 상명하복이 통할 리 없고,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으로 소관 부처마저 다른데 말이다. 어쨌거나 무관한 듯 유관한 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역학구조에는 미심쩍으면서도 꽤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사령부의 끗발을 등에 업은 안() 하사가 우직한 손[] 상병을 간교하게 부리는 듯한, 모종의 혐의를 거둘 수가 없는 것이다.

 

눈은 상좌에 틀어박혀 앉아 좋네 나쁘네 시시비비는 잘 가린다. 물건을 보고 먼저 혹하는 것도 눈이요, 맘에 안 든다고 먼저 외면하는 것도 눈이다. 간사하다 싶을 만치 변덕도 심하여 어제 좋아하던 것을 오늘 시들해 하는가 하면, 멋스럽다 치켜세우던 것을 촌스럽다 몰아세우기도 한다.

 

눈이 꾀 많은 막내동서라면 손은 무던한 큰형님 격이다. 욕심 많고 겁 많은 눈과는 달리 손은 묵묵하게 일거리를 해치운다. 손이 양파를 까고 고추를 다듬는 동안 눈은 맵다고 엄살이나 부리고, 손이 산더미 같은 일감에 지쳐 버리기도 전에 먼저 힘이 풀려 버린 눈은 저 혼자 피곤한 듯 꺼풀을 내려쓰고 염치없이 졸고 앉아 있기 일쑤다. 운 나쁜 손이 고약한 주인을 만나면 눈의 허물까지 뒤집어쓰고 고생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하는데, 눈이 점찍어 놓은 것을 손이 잘못 거들어 쇠고랑을 차는 경우가 그것이다. 먼저 욕심을 부린 것은 눈인데 죗값을 치르는 것은 손인 셈이다. 저 때문에 쇠고랑을 찬 손을 번연히 내려다보면서도 눈은 오불관언, 모르쇠로 일관한다.

 

일은 함께 해도 칭찬이나 핀잔은 함께 듣지 않는 것이 눈과 손이다. 일을 잘하면 손끝이 야물다 하고 물건을 잘 고르면 안목이 높다고 한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눈과 손의 화합은 특히 중요한데, 눈은 높은데 손이 안 따라 주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올 수 없고, 손재주는 괜찮은데 보는 눈이 낮으면 유치한 장인(匠人)으로 주저앉고 만다. 안목은 출중한데 재주가 약함을 빗대어 안고수비(眼高手卑)라는 말을 하는데, 손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누명일 노릇이다. 높은 자리에 좌정하여 세상만사를 기웃대며 거들먹거리는 것은 눈이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손이 아닌가 말이다. 바로잡건대 인간의 품위를 지켜 주는 일등 공신은 분별없고 허영심 많은 눈이 아니라 비루하고 겸손한 손이라야 마땅하다. 손이 없다면 은 쟁반에 스테이크를 담아 놓고도 돼지나 소처럼 입을 대고 핥아야 할 것 아닌가. 타고난 제 분수를 탓하지 않고 불평 없이 살아내는 손들이 있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련할 만치 너그러운 손도 그렇다고 평생 눈 치다꺼리나 하는 것은 아니다. 손도 때로는 독립 만세를 부른다. 막다른 상황에서 소통의 방편이 되기도 하고, 저희끼리 맞잡고 따스한 교감을 나누기도 한다. 사랑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데에 가장 적극적인 것도 손 아니던가. 안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감각을 분별하고 음미하는 기쁨은 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악보를 보지 않고 건반을 능숙하게 짚어내는 기억력처럼,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어디 두고 왔을 때 제일 먼저 허전해 하는 것도 손이다. 손이 어디에 떨구는지 눈은 낱낱이 지켜보았으련만, 제 일이 아니라는 듯 일러 주지 아니한다.

 

불리하다 싶으면 질끈 감아 버리고 시치미를 떼는 눈과는 달리 손은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반갑고 기쁜 일엔 활짝 펼쳐 환희작약 하지만, 분노가 치밀면 불끈 거머쥐어 매운맛을 단단히 보여 주기도 하는 손. 승산 없는 전투에서는 번쩍 치켜 올려 패배를 인정하고, 잘못이라 판단되면 먼저 비벼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용기도 빼놓을 수 없는 손의 덕목이다. 죄짓고 붙들려 온 주인의 신분까지 백일하에 드러내 놓고 마는 고지식한 결벽성마저 타고난 숙명임을 어찌하겠는가.

 

부자나 가난한 자가 똑같이 두 개의 눈을 가지고 태어나는 일은 고마운 일이다. 돈이 없는 사람도 외로운 사람도 망망대해나 만산홍엽 앞에서 공평하게 안복(眼福)을 누린다. 주머니가 비어 있는 사람이 상점의 현란한 진열대 앞에 서서 잠시 동안 꿈에 젖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똑같이 두개의 손을 갖고 태어나도 부자와 가난뱅이, 남자와 여자, 정치가와 노동자의 손이 누리는 분복은 다르다. 악수하고 도장이나 찍는 손이 있는가 하면, 곡식을 거두고 연장을 다루는 손도 있다. 재주 없는 주인을 따라 설거지통이나 들락거리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대느라 야밤에도 쉬지 못하는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의 사대육신 중에 주인의 팔자를 가장 적나라하게 살아 주는 것이 그 사람의 손인 성싶은 것이다.

 

손을 잡는다는 것. 그것은 관계의 시작이다. 모든 일은 거기까지가 어렵다. 손만 잡으면 만사가 순탄하다. 평생 셀 수 없는 사람과 눈빛을 스치며 살아가지만 누구하고나 손을 맞잡을 수는 없다. 두 손을 맞잡고 따스한 온기를 나누는 것처럼 살아가는 일에 기쁨과 위안이 되는 순간도 흔하지 않다. 흔들리는 눈빛이 아니라 굳센 손아귀를 마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한세상 함께 사는 진짜 동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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