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말 등대에서 반숙자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는 땅 끝에 있다. 영국 서남단의 콘엘 주에서도 서쪽 끝의 지점이다. 서이말 등대도 거제도 동남쪽 끝단이다. 왜 등대는 끝단에 위치할까. 의심을 품으며 찾아간 서이말 등대는 섣달 열엿새 달빛이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사람들은 이곳을 길이 끝난 곳이라고 하고 쥐위 귀를 닮았대서 서이말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등대는 유인 등대로 1944년 처음으로 점등되어 지금까지 항로의 안내자가 되고 있다. 스테파노씨의 안내를 받으며 찾아가는 밤길은 스산했다. 산속으로 달리며 보이는 것은 마른나무숲과 철책 뿐 캄캄한 길엔 자동차 불빛 외엔 어떤 불빛도 인가도 없었다. 그렇게 찾아온 등대다. 등대지기는 맨발로 이불을 날라다 주며 반겨주었다. 이 외진 곳에 강아지 한 마리와 사는 그의 하루 스물 네 시간이 촘촘하게 다가왔다. 세 사람의 직원이 돌아가며 열흘 근무에 닷새휴가. 닷새 동안은 외지와 연락을 끊고 오로지 바다만 바라보고 사는 일상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잠자리에 들었으나 의식이 명징하게 깨어난다. 잠을 포기하고 창 앞에 앉는다. 달빛은 희고 바다는 검다. 칠흑 속에서 등대불이 비친다. 이 등대는 남해연안을 항해하는 선박들의 항로를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줄기 하얀 불빛, 일부러 섬광이 지나가는 시간을 측정해 본다. 하나, , , , 정확한지는 몰라도 스물에서 다시 오는 불빛, 그러니까 20초 간격으로 불빛이 비치는 것이다.

바다에는 고기잡이배에서 해화海花가 한 두 송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바다의 꽃은 밤에만 핀다. 생존의 투망을 던져놓고 근육질 단단한 팔뚝으로 삶을 낚는 사람들. 그들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이요, 꿈의 망대다. 언제 사나워져서 목숨을 삼킬지 모르는 미망의 바다가 될지라도 바다를 떠나서는 숨을 쉴 수 없는 사람들, 밤이 깊어가자 해화가 만발한다.

해화가 아니면 바다의 존재도 느끼지 못할 이 밤, 그 불빛들 사이로, 형광불빛이 순간 파르르 피어오르다가 금세 사라져 버린다. 명멸의 순환이 고깃배는 아니다. 그럼 아득한 수평선 끝에서 보내오는 저 불빛은 도대체 무엇일까? 고도에서 만나는 구원의 불빛인양 이 밤 등대 아래 깨어있는 내 감성의 문을 두드리는 저 불빛은.

사람의 세상에도 칠흑의 어둠이 덮칠 때가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의 문이 막혀버릴 때다. 아니, 스스로 자신을 유폐시킬 때다. 그 적막이 깊어지면 영혼이 갈급해지고 어디서도 구원의 손길이 닿지 않는 늪으로 침몰한다. 거기에는 시간이 없다, 내일이 없다, 사람이 없다. 시간 없음도 내일 없음도 절대성을 지니지 못해도 사람 없음에는 낙망이다. 사람으로 해서 상처받아도 사람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 존재, 그러다가 어디서 '삐리릴'하고 신호음이 들리며 폰이 부를 때, 사람이 온다. 비록 문자 두어줄 용무가 전부라도 사람의 기척으로 내가 살아 있구나하는 실존감을 느낀다.

바로 저 불빛이다. 바다 끝 어디쯤에 섬이 있어 등대불이 비치듯 사람은 저마다 제 빛을 내는 등대가 아닐까 싶다. 저쪽 등대에서 섬광이 비치면 이쪽 등대에서 안도하고 이쪽 등대불이 저쪽 등대에서도 사람의 기척이 된다. 불빛이 오가듯 사람도 오가야 물결이 생기고 노래가 된다. 등대지기 아저씨의 말을 분추한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이다. 사람의 정이다. 기척에서 출발하여 소통에 다다르면 적막하기 그지없는 고도에도 의욕이라는 꽃이 핀다고. 나는 지금 우연찮게 서이말 등대에 와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바다에는 큰 파도 작은 파도 잠잠할 틈이 없다. 사람들은 한 지붕 아래서 먹고 잠자면서 모두 절해고도에서 산다고 아우성이다. 독거노인들이 밤새 사라지고 어제 만났던 사람이 오늘 부재다. 불확실한 시대에 불확실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서로 외롭다고 불빛을 보내지만 응답이 없다.

등대는 바다의 꽃이다. 항해사들의 위로요 안내자다. 캄캄한 밤 선박들이 안전하게 운행하도록 백섬광을 보내 선박들을 지킨다. 거친 바다, 긴 항로에 지친 항해사들에게 주는 반가움이요 안식의 불빛이다. 나는 이 밤, 내가 세상에 보낸 빛은 백섬광 몇 초나 될까, 아니 고장난 등대가 아니었을까. 멀리서 좌초한다고 애타게 불빛을 보내지만 나와 상관없다고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밤을 지새우며 건져 올린 것은 싱싱한 대어가 아니라 죽어가는 불빛들 아스라한 잔영이었다.

끝단은 또 하나의 출발점이다. 집에 돌아가면 세상의 끝 대구 사서한 고도에서 사는 어떤 수인에게 그가 보고 싶다는 책을 꾸려 보내야겠다. 당신의 불빛을 보았노라고, 항해의 끝에는 가족이라는 등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엽서도 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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