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모자/ 설성제 

해변에 모래산이 둥두렷했다. 모래 조각품 전시회가 끝난 후 모래들이 다음 꿈을 꾸고 있다. 성을 쌓고 두꺼비집을 지어도 곧 허물어지는 것이 모래인데 많은 재료 중 하필 모래를 도구로 삼은 조각가들의 작품을 이루고자 하는 투지가 대단하다. 바람 한 점, 물결 하나에도 스러지고 마는 작품을 위해 흘린 땀을 저 모래산은 아는 듯 바닷바람에 숨을 일렁인다.
   청년들이 제법 눈에 띈다. 기다릴 부모님일랑 생각지도 않고 해변에 둘러앉아 목청껏 노래한다. 열심히 이야기한다. 청아한 웃음소리를 바다로 날리는가 하면 발악을 하며 젊음을 기승부린다.
   어디선가 환호가 들려온다. 소리를 더듬어 가보니 관객들이 둘러서 있다. 한 청년이 불로 쇼를 벌이는 중이다. 길쭉한 병 서너 개의 주둥이마다 불을 붙여놓고 공중으로 던지며 돌려받기를 한다. 연이어 팔다리 사이로 여러 개의 불 병이 날아다닌다. 그러다 주둥이가 활활 타오르는 병을 하나씩 바닥으로 내던진다. 불은 피시식 연기를 토하며 사그라진다.
   그는 단상에 폴짝 뛰어오른다. 몸에 착 감긴 검은 반팔 티와 반바지 차림으로 연신 배와 엉덩이를 볼록거려댄다. 마치 바위 뒤에 숨었다가 나타난 원시인 같다. 사방 관중을 향해 인사를 하더니 “여기 수 년 동안 불 하나로 버티며 살고 있는 저를 위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감사합니다!”라고 외친다. 소나기 박수가 터진다. 그는 다시 단상에서 뛰어내리더니 한쪽 다리를 뒤로 쭉 뺀다든지 짧은 팔을 공중으로 치켜 흔든다. 다시 불붙은 병으로 쇼를 보여주기 위한 몸짓 같다.
   그는 흩어진 병을 주워 모은다. 병마다 불을 붙여 이번에는 얼굴 가까이로 가져간다. 여기저기 비명과 응원이 파도처럼 덮친다. 그는 더욱 신바람난다. 급기야 병 주둥이에서 피어오른 불꽃을 한 잎 한 잎 따먹듯 입술로 핥는다. 어둠 속에서 반들거리는 눈빛으로 관중의 반응까지 살펴가며 우스갯소리로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에 불이 붙기라도 할 까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난다.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꿀떡꿀떡 들려온다. 나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어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눈만 내놓는다. 행여 그가 실수라도 할까 봐 애가 쓰인다. 그는 관중의 두근거리는 가슴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더욱 촐싹거리며 뜀박질하며 불꽃을 피우고 키우고 사그라뜨리기를 한다.
   신기 방통한 불을 오래도록 혼자 만지고 다듬은 것이 분명하다. 온몸에서 자유자재로 가지고 논다. 머리카락을 셀 수 없이 태웠을테고 화상으로 물집 잡힌 데가 한두 곳 아니리라. 하필 작은 불씨를 선택하여 쇼를 보여주는 것은 불씨 하나만 잘 간수하면 다른 밑천이 들지 않는 장사여서일까.
   높은 학력에 탑재기 한 스펙에도 불구하고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 3포, 5포, 7포세대로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적 삶의 요소를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끓는 피를 사회와 나라를 위해 쓰고 싶은데 일자리의 문이 쉽사리 열리지 않는다. 저 불놀이하는 청년은 이 어려운 시대를 이겨내려 오히려 원시적 삶으로 돌아간 것일까. 프로메테우스가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낸 담대함까지 드러내며, 불이면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 원초적인 도구로 인생을 뜨겁게 변화시키고자 꿈꾸는 것 같다.
   마침내 그는 불을 입속으로 가져간다. 환호가 어둠 속으로 퍼져간다. 청년은 모랫바닥에 벗어놓은 자신의 검은 모자를 머리 위로 쳐들며 “여러분, 저의 미래만큼이나 암울한 모자에게 박수해 주십시오.”라고 외친다. 여기저기 지폐가 모자 속으로 날아든다. 청년은 두 눈이 유난히 반짝인다. 그러고는 또다시 촐싹대며 모래바닥을 팔딱팔딱 뛰어다닌다.
   해마다 이 모래밭에서 세계불꽃축제가 열린다. 짧은 시간 동안 세상에 없는 불가사의한 꽃들이 피어난다. 바다 위에 피어오르는 화려한 불꽃을 위해 수억의 돈이 든다. 해안은 인파로 북새통이다. 해변과 언덕, 카페와 차 안에 일찍 자리를 잡아놓고 불꽃을 애타게 기다린 사람들은 황홀한 밤을 맞는다. 하늘을 꿰뚫을 듯한 폭음에 해안은 온통 불꽃 밭이 되고 별 밭이 된다. 불꽃의 거대한 폭포로 떨어져 내리고 강물처럼 꽃잎들이 흘러간다. 형언할 수 없는 불꽃들이 하늘에서 바다로 모래사장으로 내려오는 동안 꽃이 꽃을 낳고 낳는다. 그러다 끝내 사라지고 축제의 여운만 바다 위로 떠올라 별을 비춘다.
   불꽃축제는 불의 최첨단을 보여주는 듯하다. 과학, 공학을 뛰어넘어 예술로까지 피워 올린 불이라면 이 청년의 불은 그때 떨어진 불씨 하나를 잘 거두어 두었다가 꺼낸 것일까. 호리병에 간직해 둔 불씨 하나로 꿈을 길어 올리고 있는 청년이 수억 대의 돈이 아닌 성냥 한 개비 값만 있어도 그 한 몸 가눌 수 있을 거라며 저토록 푸른 웃음을 짓는다.
   청년 실업에다 꿈이 사라진 세대라고 걱정하지만 청년들은 꿈을 꾼다. 늦은 밤 검은 모자처럼 자신의 미래가 암울하다고 외치며 해안이 울리도록 웃음 짓는 청년이 있다. 그들의 열정이, 그들이 피운 불꽃이 살아있도록 마음껏 기립 박수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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