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채의 집 설성제

  

나는 집을 세 채 가지고 있다. 평소 집을 관리하는 일이 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산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두고 입을 댄다. 참 욕심이 많다느니, 고생을 사서 한다느니. 하나 정도는 처분하고 홀가분하게 살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그러나 모르는 말씀이다.

나의 집들은 모두 맞물려 있어 한 채를 포기하면 나머지도 힘없이 무너지게 된다. 그러니 하나도 포기할 수 없고 소홀히 할 수도 없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긴밀할 때 삶이 탄탄해지듯 나의 집들이 그렇다.

첫 번 째 집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이다. 식구들은 집을 소유하는 것에 걱정이 많았다. 응당 모두 기뻐할 줄 알았는데 나의 기대가 빗나갔다. 대출이 많았던 것이 문제였다. 안정된 직장 없이 빚을 갚아간다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다. 내 집도 형편과 상황에 상관없이 때가 되었기에 주어진 것이라며 식구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런 운명 속에 내가 오래전부터 꾸어 온 꿈도 속해 있었다. 집을 옮겨 다니고 전세 값을 올려주며 전전긍긍하는 생활이 싫었다. 안정된 집을 갖고 몸이 좀 더 편해지길 원했으니 그 간절함이 하늘에 닿은 모양이다.

베란다와 거실을 합치고 천장과 벽을 나무로 했다. 창문과 욕실을 비롯한 집안 구석구석을 리모델링했다. 오래된 집이지만 손길을 주면 새로워지는 공간에서 마음껏 휴식을 즐겼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이라도 내 집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몸도 마음도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두 번 째는 글로 지어가는 마음의 집이다. 글쓰기는 몸을 피곤하게 하고 시간을 잡아먹는 날도둑이다. 특별한 보상이 없다. 그럼에도 혼자 좋아서 하는 일이고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이다. 글 집을 짓는데 필요한 재료와 능력이 부족한데도 글을 쓰며 사는 것이 현실이며 꿈이다. 추억을 꺼내어 사유와 버무리고 사물을 형상화 시키고 수사로 양념을 치는 일이 즐겁다. 문장이 만들어지고 글이 모양을 갖추어갈 때 나도 모르게 터져나는 괴성은 내 마음의 넘쳐나는 즐거움의 표시이다.

마음의 집을 엮은 책이 나올 때 사실은, 두렵다. 내 것인데 낯설어 보인다. 내가 몰랐던 나를 본다. 육신적 삶이 글 집을 통하여 태어난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말도 한다. “글에서 돈이 나오니, 밥이 나오니?” 무모하게 글을 쓰느니 차라리 생산적인 일을 해서 육신의 집을 넓히는 편이 낫다고 한다. 그러나 글 쓰는 일만큼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일이 어디에 있는지 그들은 모르는 것 같다. 내가 쓴 글에 타인이 들어와 함께 나누는 기쁨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나는 이보다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가 없다. 비록 초라하고 작은 집이지만 누군가 공감하고 삶을 나눌 수 있다면 충분히 즐거운 집이다.

인간의 기억은 시간의 물살을 타고 쉼 없이 흘러간다. 그 사라지는 것들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 글이다. 추억이나 기억이 글 속에 들어오고 읽혀질 때에만 생명을 얻는다고 존코널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책에서 말했다. 사람은 육신의 집으로만 살 수가 없다. 누구나 마음의 집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다. 마음의 집을 잘 짓기 위해서는 영혼을 잘 지켜야 한다. 영혼으로 쓰는 글, 영혼으로 하는 행위는 깊은 울림으로 가슴을 적시니까.

세 번 째는 기도로 쌓아가는 영혼의 집이다. 기도는 육신의 삶과 마음의 이야기로 만들어져서 내 영혼이 이 땅과 저 하늘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절대자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써야한다. 그러나 인간만큼 간사하고 연약한 존재가 없기에 계획과 노력만으로는 영혼의 집을 세울 수 없다. 그 집을 일으키고 완성되도록 하는 절대자의 손이 아니면 설 수 없는 집이다. 골방에서 낙타무릎과 비둘기의 눈물로 집을 짓고 삶에 절제라는 필수재료를 놓치면 허물어지기 쉬운 집이다.

사람들은 영혼의 집을 지닌 나를 보며 지금 아닌 나중 세상을 떠날 즈음에 마련하면 되지 않겠냐고 한다. 그러나 내 영혼이 오늘밤 어떻게 될 지를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고 했으니, 영원한 세계로 불려갈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인생이라 했으니, 두렵다. 살아있는 것들은 반드시 한번 죽는 것이 이치이며 진리이기에 어찌 지금 눈앞에 보이는 대로만 살다가 어느 날 홀연히 보이지 않는 그 세계로 갈 것인가. 날마다 다듬고 보수해나가는 일이 만만치 않아 돌보기 힘든 집, 살아있을 때 준비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집. 그 안에 내가 깃들고 그 집이 내 안에 깃들어 육신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 되길 꿈꾼다.

세 채의 집을 관리하고 지키며 사는 일이 삶의 전부인 것 같다. 어느 하나를 버리면 좀 자유롭고 가벼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배가 침몰할 때 자신이 가진 물건을 내다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릴까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집 세 채를 잘 지니기 위해 힘에 부칠 때가 많은데,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버릴까. 몸 붙이고 살아야 할 육신의 집? 내면을 비추고 다듬어내는 마음의 집? 하늘을 소망하며 이루어가는 영혼의 집?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포기할 수가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꾸역꾸역 지녀가고 있으니 욕심이 과하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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