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광부(白首狂夫)의 겨울 장기오

 

올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자고 나면 발목이 빠질 만큼 눈이 이틀에 한 번씩 내렸다. 연일 최저 기온을 갱신하면서 내가 있는 시골은 영하 29도까지 내려갔다. 아침에 커튼을 열면 유리창에 허옇게 두꺼운 성에가 앉았다. 어둠살이 깔린 박명 속으로 눈은 형광처럼 푸르른 빛을 뽑아내고 먼 산은 차디찬 은빛으로 내 눈을 찔러왔다. 갈 까마귀 떼가 내려앉은 빈 들판은 황량했고 허무했다. 바람은 날카로웠다. 길 옆 가로수는 휘파람 소리를 내며 울고 바람이 한차례 불 때마다 가지 위에 쌓였던 눈이 안개처럼 흩뿌려졌다. 이 고즈넉한 아침.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명징하고 깨끗한, 그리고 쓸쓸한 아침을 맞는다. 살아오면서 이런 아침을 얼마나 만났던가? 아무도 없이, 그래 아무도 없이 혼자 이렇듯 죽은 듯이 고요하고 쓸쓸한 아침을 만난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추위에 한껏 몸을 웅크리고 나는 겨울 풍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

"마음이 공허한 자여, 빈 곳을 보라. 그곳에 밝은 햇빛이 넘치듯 길함이 있다. [瞻彼闕子虛室生白吉祥止止]"

장자가 그랬다. 무상無相이 실상實相이라는 설법인가. 그런가? 길함이 있을까? 날마다 편지를 기다리고 매일 메일을 열어보지만 염량세태가 매양 그렇다.

겨울이 깊어갔다.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른다. 집안에서도 두꺼운 털옷을 입고 혼자서 책을 읽거나 음악 듣고 있다. 당초에 이 시골에 올 때는 그리하리라 작정을 하고 왔다. 서울 있으나 시골 있으나 매양 그러하거늘 구태여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기에 이리로 옮겨온 것이다. 지인 하나가 그랬다.

"미친놈[狂夫], 머리는 허옇게 해가지고[白首] 이 무슨 청승이냐? 늘그막에 부부가 서로 등 기대며 서로의 온기로 살아야 하거늘." 하며 쯧쯧 혀를 찼다.

별다른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차마 하질 못하고 웃고 말았다. 좋은 물건을 봐도 욕심이 나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도 없다. 욕정도 사랑도, 꿈마저 모두 기화해 버린 내가 비 맞은 새처럼 초라하고 남루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내가 강을 건너고자 할 때 누군가가 '임이시여, 그 강을 건너지 마시오.' 하고 노래라도 불러주었던들 하고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수십 년을 같이 살아왔어도 생각도 다르고 취향도 다른데. 같이 있으나 따로 있으나 매양 한 가지일 것이다. 강 이쪽저쪽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젊었을 때 삶의 중심이었던 그 모든 것들은 어디로 갔는가? 젊었을 때는 세월에 떠밀려 살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발버둥 치는 듯해 부끄러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삶을 반추한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치부, 건드리고 싶지 않은 영혼의 상처, 아픔. 내가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생각해 본다. 회한만 남는다. 죽어라 뛰어도 제자리인 삶, 한자리 건너뛰면 또 한자리가 아늑한 멀고도 험난한 여정, 가난해서 혹은 빽이 없어서 분노하고 절망하면서도 이 악물고 버티어 온 한 평생, 나야 그 한을 이기지 못해 한 평생을 몸부림치며 떠돌았지만 그게 자식들에게 새로운 한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 아이들만은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본다. 우리 아이들만큼은 이런 윤회를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동도 트기 전 깜깜한 새벽에 어린 새끼들을 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자식들을 보면서 이 험한 세상을 저 젊은 것들이 어찌 헤쳐 나갈지를 생각하면 새삼 아득해진다. 인생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는 걸 이미 어떤 시인은 읊었다지만 꽃 진자리의 적막을 누가 세세히 알리오. 내 마음의 강물은 이미 아우성치며 한 굽이를 돌아나간다.

너무 길어 꿈도 토막 나는 겨울밤, 누구의 손이라도 잡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때, 나는 난로에 불을 피우고 장작 타는 소리, 창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처마에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 추녀 밑에서 연신 울어대는 풍경소리에 귀 기울이며 따뜻한 찻잔을 손에 움켜쥐고 작설의 향을 맡으며 그리움을 달랜다. 빈 집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그렇게 겨울을 난다. 이경을 넘으면 바람도 잦으리라. 눈도 그치고 달도 뜨리라. 겨울밤은 너무 길다. 생각도 길어진다.

누군가 문을 흔드는지 덜컹거린다. 문을 열어본다. 바람이다. 잠시 뜸했던 눈발이 다시 굵어진다. 막소금을 뿌리듯 벌판을 흰 사선으로 눈발이 내리 꽂히고 있다. 길이 보이질 않는다. 세상은 온통 흰빛이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논밭인지 구분이 안 된다. 추위도 잊고 그 광경을 한참을 바라본다.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 그래, 이쯤에서 길을 잃는 것도 좋으리라. 설사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어차피 이 말류의 시대에 태어난 미욱한 삶인걸. 편안하게, 세상사에 귀 기울이지 말고, 일비일희하지 말고 이쯤에서 외롭게 서자. 적멸寂滅에 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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