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녘 / 류창희

 

 

 

노을빛마저 산 뒤편으로 넘어간다. 게으른 자 석양에 바쁘다더니 꼭 이 시간에 봐야 하는 숙제도 내일 당장 돌려주어야 할 책도 아니면서 어둠 속에서 빛을 모으고 있다. 어쩜 빛 속에서 어둠을 맞이하는 나만의 의식일 수 있다. 식구들은 현관에 들어서다 말고 컴컴한 데서 뭐 하냐?” 매번 타박한다.  언짢은 일이 있었나?’ 염려하는 마음에서다.

선선한 계절에는 밥솥에 저녁쌀을 안쳐놓고 야산에 오르곤 한다. 기껏 해봐야 중턱을 거닐다 새 소리나 풀벌레 소리를 듣는 가벼운 산책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제비꽃이나 양지꽃 몇 송이를 보며 기다리는 소리는 따로 있다. 건너편 암자에서 들리는 저녁예불소리다. 마을 창가에 한 집 두 집 불이 켜진다. 불빛에서 저녁밥 냄새가 난다.

내가 살던 고향은 초가지붕 위로 집집이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어두워졌다. 뭉게뭉게 솜꽃같이 둥글고 뽀얀 연기는 안 동네 기와지붕 위로 올라간다. 장작불을 때는 큰댁 연기이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가늘게 올라가다 흩어지는 꼴은 우리 집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다.

사랑방에서 할아버지가 공자 왈 맹자 왈 읊는 소리만 들렸지 장작을 팰 튼실한 일꾼이 없었던 우리 집. 북서풍에 청솔가지로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엄마는 아침저녁으로 매캐한 연기에 설음을 토해내셨다. 철없는 딸은 연기만 보면 사람보다 밥이 그립다. 구수한 밥, 들척지근한 엿, 풋풋한 쇠죽 끓이는 냄새는 허기를 달래준다.

방안에 등잔불을 켜기 전에 이른 저녁을 먹었다. 잔치, 초상, 제사나 가을걷이 타작하는 날, 섣달 그믐날이 아닌 날에 불을 켜고 밥 먹는 일은 게으른 며느리의 흉 거리다. 밥상을 차리며 엄마는 사랑방에 계신 할아버지를 모셔오라고 한다. 사랑채 앞을 살며시 빠져나가 할아버지, 진지 잡수세요.” 외치며 방앗간 동네로 달음박질쳤다. 안동네와 달리 타성바지 아이들은 늦게까지 놀 수 있다. 그 동네 어른들은 밭일이나 나무하러 가서 저물어야 돌아오기 때문이다. 고무줄 놀이하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신이 났다.

어둠은 고깔모자처럼 꼬맹이들 머리 위까지 덮어씌우려 한다. 손녀딸만 셋을 키우는 성정이 불같은 춘복이 할아버지가 키보다 훨씬 높은 나뭇짐을 지고 밭을 가로질러 달려오신다.

말만 한 지집아들이 다 저녁때 가랑이를 벌리고 겅중거린다.”며 작대기를 휘두른다. 정작 고무신을 벗어놓고 펄쩍펄쩍 뛰놀던 아이들은 다 도망가고, 구경하러 갔던 콩만 한 계집아이 혼자만 잡혀 혼쭐이 난다. 할머니는 나를 앞세워 경을 치러 간다. 그런 날, 달빛 아래 할머니와 손녀딸은 밤 마실 동지가 되어 돌아왔다.

여행길 뉘엿뉘엿 석양을 뒤로하고 숙소를 찾는다. 낯선 마을에 들어설 때, 혹은 집으로 돌아올 때, 나는 늘 후렴처럼 되뇌는 소리가 있다.

~ 좋아, ~ 좋다.”

스르르 안온한 감정에 무르익어 내는 꽃 신음이다. 어스름에 무작정 취한다. 딱히 고달플 것도 없는 날들인데, 나는 늘 어둠이 내리는 시간이 되면 쉬고 싶다. 낮에 지나치게 많이 한 말, 욕심에 종종걸음 치던 발자국들을 다 덮어줄 것만 같다.

해가 지면 할머니도 아들을, 엄마도 아버지를 더는 기다리지 않았다. 별 문단속이 없던 시절, 개 짖는 소리는 오히려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밤손님은 낯선 사람일 뿐이다. 등잔불 밑에서는 모든 일을 멈추고 옛날이야기를 듣거나 이불 속에서 발장난을 쳤다. 어릴 때의 습관처럼 지금도 나는 밤이 편안하다. 기다림이 끝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생각을 모으는 일은 밤이 되어야 할 수 있다고 한다. 책상 앞에 앉아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면서 글쓰기도 한다는데, 해 떨어지고 난 다음의 나는 도무지 생산적이지 못하다. 오죽하면 입시생 어미시절에도 9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잠잤을까.

어떤 심리학자가 생애 최초의 기억이 그 사람의 정서情緖 라고 했다. 나의 밑그림은 어스름한 저녁 무렵, 부엌과 뒷간 사이에 내가 앉아있다. 모락모락 뜨거운 메주콩을 찧는 절구통 옆이다. 절구통 밖으로 튀어나오는 콩알을 주워 먹는 애틋한 정경이다. 절구질하는 엄마와 작은어머니 옆에 한 덩이씩 손으로 메주를 주무르는 할머니도 보인다. 어슴푸레 고즈넉한 수묵화다.

딸은 엄마를 닮는다더니, 엄마도 어둠이 내리는 저녁 무렵을 좋아하셨나 보다. 친정올케가 어머니, 어떤 커피 드실래요?” 물으니 커피면 커피지, 무슨 커피?” “아니요, 해즐럿 드실래요, 믹스커피 드실래요?” “나는,       마실란다.” “하하하” “호호호 글 쓰는 딸의 엄마는 커피 빛깔도 해질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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