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등 / 반숙자

 

 

 

 

서리가 내리면 인근의 초목이 두 가지 빛깔로 나뉜다. 철모르고 푸르던 풋것들이 한꺼번에 담청색으로 주저앉는가 하면 나무들은 더 붉게 노랗게 불을 지핀다. 조락과 만가의 사이 밭둑이 환하다. 마을에서도 외돌아 앉은 골짜기가 갓등을 밝힌 대청처럼 환한 것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 때문이다. 한 잎도 빠짐없이 노랗게 물들여놓은 누군가의 솜씨에 감탄하면서 하염없이 상수리를 올려다본다.

벌써 8년 전, 그때 매스컴에서 은행나무의 효용성을 두고 대서특필했다. 은행은 물론 잎사귀까지 약재로서 귀한 존재여서 많이 심으라는 권고까지 있었다.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밭 끝머리 경사진 곳에 심을 만한 과목이 만만치 않아서 궁리 끝에 은행나무를 구해서 심은 것이다.

올가을 들어 두 번의 서리가 내렸다. 서리가 내릴수록 폭발할 듯 환해지는 은행나무에 반해서 읍내서 자주 내려오는 나를 마을 사람들은 알 턱이 없다. 어쩌다 마주치면 굳이 손을 잡고 당신 아들 혼처 좀 알아보라고 은근히 재촉하는 눈길들이 더욱 간절해졌다. 원칭이 댁이 손꼽는 마을 노총각이 자그마치 열, 나이 서른에서 마흔 셋까지란다. 직장 있고 농토 있어 먹고 사는 일은 그만하니 무던한 처녀를 알아보라 하지만 처녀 당사자들이 농촌 총각들을 눈곱만치도 생각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하다못해 동남아 처녀들을 사다가 혼인을 하는 집도 많은데 어쩌자고 이 마을 총각들은 순종만을 고집하는지 아직 국제결혼한 사람이 없다.

차에서 내려 정자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천천히 걷는다. 마을 초입에 가로수로 심은 은행나무들은 다산의 촌부처럼 많은 열매를 달고 섰다. 이제 머지않아 은행들이 떨어지면 동네사람들이 옴팍 쏟아져 나와서 일삼아 주울 것이다.

은행나무는 은행나무과의 1 1종이다. 그래서 외로운 나무다. 한번 심으면 천년을 살고 수확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다른 종들의 나무는 교합되고 변질되고 변형되기도 하나 이 나무만은 중생대의 모습 그대로라고 하니 학술적 가치도 높다하겠다. 마을 언덕에서 바라보는 우리 집 나무는 오늘따라 더 호젓해 보인다. 주변의 나무는 아직 황갈색으로 가을을 붙잡고 있는데 은행나무는 여한 없는 표정이다.

열매가 열리기 시작하기 전에는 암나무 수나무를 구별할 방법이 없어 아예 두 그루를 사다 심었다. 우리 집으로 온 지가 8년째니 그만한 나이가 되면 쥔장인 나에게 뭔가를 보여줄지 알았다. 오월부터 조바심쳤다. 나무 밑을 오가며 올해는 ... 올해는 ...하기 삼 년째다. 기미가 없다. 삼 년생 나무를 심은 지 5년이나 되는데 아직도 수태 고지서를 받지 못한 것일까. 키가 하늘을 찌르고 밑동이 듬직해졌다. 그제야 우리 나무들이 하늘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은행나무는 암 수가 따로 있어 바람에 의해 수분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애초부터 두 그루를 사다 심은 것이다. 서로 바라보아야 수태를 한다는 것은 사람으로 치면 신비한 만남의 조건이지 싶었다. 바라본다는 것은 관심이고 사랑이다. 나무들도 서로 바라보는 동안 연정이 생기고 정분이 나고 합치고 싶어 결국 수태를 하는 것일 것이다.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난여름 들녘에서다. 오래 동안 비가 오던 날씨가 며칠 반짝 개었다. 날씨가 개이자 하늘은 이글거렸고 땅은 용트림을 했다. 며칠이 지나자 꼿꼿하던 벼들이 배가 터지면서 자마구가 솟아올랐다. 그러니까 하늘이 논으로 뛰어내려 벼들을 안고 뒹굴더니 모두 혼인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천지조화고 음양의 이치일 것이다.

잎이 푸르렀을 때는 어딘가 열매를 달고 있지 싶었다. 다만 초록동색이라 눈에 띄지 않을 따름이라고. 그런 자위 속에서도 여름은 가고 가을이 왔다. 마을의 은행나무에는 다닥다닥 붙은 열매가 선명하게 보일 때도 우리 집 나무들은 푸르기만 했다.

나는 혼기 찬 아들을 둔 어미처럼 우리 집 나무들이 멀리 눈을 두어 마을 초입에 있는 은행나무들과 정분이라도 났으면 싶었다. 바로 옆에 있는 나무가 이성이 아니라 동성일 겨우도 있으니 자구책을 찾았으면 했지만 나무는 마이동풍이다.

지금 내 마음은 마땅한 혼처를 물색해 달라던 원칭이댁 심정과 다를 것이 없다. 나무는 나무여서 내 초사는 들은 척 만 척 찬 서리 내리는 가을, 마지막 점등에 바쁘다.

황금의 나무, 잘 생긴 신사, 잎과 열매, 목재까지 인류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는 자애의 나무. 천년을 살아도 휘지 않고 곧은 자태가 오늘따라 더 믿음직하다. 그럼에도 열명의 노총각들이 우리 집 은행나무와 겹쳐지는 것은 어인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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