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를 기억하다 이현실

 

봄은 들릴 듯 말 듯 속삭임으로 온다. 아무리 삶이 무거워도 희망을 품으면 생명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봄이다. 따사한 바람 등지고 길을 걷다가 풍경 하나에 눈이 꽂혀 발걸음을 멈췄다. 노란 민들레 한 송이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다소곳이 피어있다. 불현듯 오래전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십오 년 전쯤이었다. 당시 나는 00작가회의 임원을 맡고 있었는데 회원들과 함께 교도소 재소자를 위한 위문행사로 백일장을 주관한 적이 있었다. 입상자들에게는 시집과 수필집 등 읽을거리 책이 주어졌고 우수작품 몇 명을 선정하여 특별히 하루 외박이 허용된다고 했다. 참가자들은 대개 출소를 앞둔 모범 기결수들이 대부분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행사장에는 족히 400여 명이 넘는 재소자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턱수염이 깔끔하게 정돈된 이십 대의 청년도 있었고 육십이 넘어 보이는 사람도 더러 섞여 있었다. 그들은 수인번호가 적힌 푸른 수의를 입고 있었을 뿐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들 모습 그대로였다. 오히려 검은 정복을 입고 주위를 살피며 긴장하고 있는 교도관들의 모습이 분위기에 맞지 않아 어색하게 느껴졌다.

재소자들이 정성들여 쓴 원고를 읽으면서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왔다. 또박또박 쓴 글도 있었으나 삐뚤빼뚤 읽기 힘들게 갖가지 사연이 깨알같이 적혀 있기도 했다. 주제가 어머니였기 때문에 애절하고 눈물겨운 사연이 많았다. 그날 내가 읽은 작품 중에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 애절한 한 편의 시가 있다. 연과 행을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기억에 남는 시의 내용을 정리해본다.

나는 수형 번호를 부착한 채 푸른 수의를 입고 앉아있다. 식구들은 노모에게 나의 소식을 쉬쉬했고 소식 없는 아들을 궁금해 하시던 어머니는 일주일 무소식에 괘씸해 하셨다. 일곱 달째 곡기를 끊으시다 열 달이 가까울 즈음 노모는 기어이 담장의 비밀을 알고 마셨다. 구치소에 면회 오신 노모의 나일론 보자기 속에는 아들을 위해 마련한 속옷 몇 벌과 양말이 들어 있었다. 속곳 속의 쌈짓돈을 풀러 영치금을 내미시던 어머니의 떨리던 두 손을 잊지 못한다. 민들레 홀씨가 되어 어머니께 날아가고 싶다-는 애절한 바람이 적힌 그런 내용이었다.

원고를 펼치자마자 노란 민들레에게 문득 시선이 붙박이처럼 박혔다. 가로로 줄이 그어진 편지지에 시를 써놓고 스카치테이프로 민들레를 고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름도 얼굴도, 시의 제목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느 수형자의 절절했던 한 편의 시가 아직껏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애간장을 다 녹인다는 말이 있다.

중국 진나라의 환혼이라는 사람이 촉나라로 가던 도중 삼협 땅을 지날 때의 일이다. 환혼의 하인이 근처 숲에서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붙잡아서 배로 돌아왔다. 그 광경을 본 어미 원숭이가 뒤를 따라오며 물을 사이에 두고 강가에서 슬프게 울고 있었다. 강기슭을 따라 배를 계속 쫓아오면서 새끼 원숭이를 보고 울부짖었다. 이윽고 백리도 더 가서 배가 강기슭에 닿자 어미 원숭이는 새끼가 붙잡힌 배로 뛰어들었으나 끝내 그대로 죽고 말았다. 사람들이 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어미 원숭이의 창자가 토막토막 잘려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단장斷腸이라 말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자주 부르던 '단장의 미아리 고개'란 가사가 여기에서 기인하였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 그것은 원초적인 본능 같다. 순간적인 충동 때문에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며 통회의 눈물을 쏟았을 그 사람. 거대한 콘크리트 담장 어느 귀퉁이에 피어 있었을 한 송이 민들레를 꺾어 소중하게 말렸을 것이다. 어머니를 그리는 한 편의 시를 쓰고 하단에 민들레꽃을 붙여놓지 않았을까.

수형자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후회를 하고 있었겠지만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 가슴 속은 새끼 잃은 원숭이의 내장이 다 타버려 녹아 없어지듯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께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에 훌훌 날아가 위로 드리기 위해 민들레 꽃잎을 꺾어 원고 말미에 붙여놓지 않았을까.

순환과 생성을 거듭하며 다시 맞는 2018년의 봄,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이 세상 모든 어미의 마음은 한결같을 것이다. 험한 세상, 온몸이 부딪쳐 깨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는 어미의 간절한 마음으로 나는 한 편의 시를 썼다. 세상의 늙으신 모든 어머니께 사랑과 존경을 보내며 이 시를 바친다.

 

절반의 봄

 

길가

보도블록 틈새 노란 민들레

,

한 송이 졌다

 

한 생애가 흘러가고

절반의 봄만 남았다

 

한번의 입김에도 가벼운 생.

지상 어디에도 무차별 착지할

행랑처럼 짊어진 씨방주머니

 

작은 바람에도

멀리

더 멀리

지구 끝까지 날아가 뿌리를 붙이거라

바람의 등에 업혀 꽃시를 보내는 어미의 마음

 

언제나 제자리걸음인

물기 마른 나를 보며

씨 한 줌 공손히 집어

손바닥에 올려놓고 목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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