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서클 정성화

  

며칠 전부터 형광등이 켤 때마다 아슬아슬했다. 스위치를 올리면 한두 번 끔뻑거린 뒤에야 불이 들어왔다. 그러던 게 오늘은 아예 반응이 없다. 의자를 놓고 형광등을 떼어 보니 양쪽 끝이 거무스름하다. 백열등보다 느린 녀석이 제 긴 몸에 불을 당겨오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지 '다크서클'이 짙다.

이젠 불을 끌어오지 못하지만, 일하는 내내 뜨거웠을 형광등의 몸체를 잠시라도 선선한 곳에 눕혀준다. 내가 형광등의 다크서클을 예사로 봐 넘기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남편이 두어 달 걸리는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늘 그의 눈 밑부터 살폈다. 눈 밑이 맑고 깨끗할 때가 별로 없었다. 거무스름하거나 심할 때는 푸르죽죽하기까지 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되었냐고 하면 "이만하면 미남이지."라고 그는 얼버무렸다. 컨테이너선이 태평양을 건너는 데는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는다 . 그 배를 타고 있는 선원들은 일주일 만에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게 된다. 항해 하는 동안 하루에 한 시간씩 시간을 전진시키거나 후진시켜야 하니, 수면 시간과 식사 시간이 매일 바뀌어 파로가 쌓일 수밖에 없다.

배라는 것은 화물을 싣고 바다를 오갈 때만 운임이 산출되기에 바쁘게 움직인다. 아무리 기상 조건이 나빠도 정해진 날짜에 입항하고 출항해야 한다. 언젠가는 입항하자마자 '선박 검사'를 받는 바람에 두 달 만에 보는 남편을 부산역 앞의 아리랑호텔 커피숍에서 겨우 한 시간 만나고 헤어진 적도 있다. 서로 얼굴 한 번 보고 시계 한 번 들여다보고 하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나는 것은 그의 눈 밑에 짙게 드리워져 있던 다크서클뿐이었다.

땅을 디디며 살게 되면서 그의 다크서클도 차츰 옅어져 갔다. 흔들리지 않는 침대에서 잠을 자고 제때 집밥을 먹은 덕택이려니 했다. 그러나 그애게는 또 다른 다크서클이 있었다.

그는 자주 악몽에 시달렸다. 배에는 없었던 마누라도 옆에 누워 있겠다 그가 편히 못 잘 이유가 없는데도 그랬다. 자다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거나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혹시 마누라 몰래 사채업자의 돈을 끌어다 쓰고 그들로부터 갚으라는 협박을 받는 중이냐고 물었다. 아니면 우연히 지난날의 첫사랑을 만났는데 지지리도 고생하고 있어서 괴로워하는 중이냐고 했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젠 수필 대신 소설을 쓰는 거요?"라고 했다.

그는 잠이 들면 다시 선장 업무를 보게 되는데, 승선 중에 일어났던 사고들이 꿈속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된다고 했다. 항해 중에 선원 한 사람이 사라져 배 곳곳을 수색하며 억장이 무너졌던 일, 갓 입사한 갑판부 선원이 선체에 도색 작업을 같이하던 중 선창에 떨어져 죽은 일, 배에 적재되어 있던 컨테이너 박스에서 불이 나 일박 이일 동안 불을 껐던 일 등, 모두 사람의 목숨이 달린 절체정명의 사고였다.

꿈이란 자신의 심리적 체험이 상영되는 내적 공간이다. 그 무렵에 놀란 신경 조직이 아직 아물지 못한 데다, 그 흔적에 잠재의식의 빛이 들어가 당시 상황이 재현되는 것으로 짐작한다. 배를 총체적으로 관리하고 스무 명 남짓한 선원들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서 그가 받은 고통과 자책감이 얼마나 컸을까.

소리와 진동에 예민한 것도 여전하다. 그가 잠들었다 싶어서 살며시 선풍기를 끄면 바로 깬다. 배의 엔진이 멈춘 줄 알았다면서 발칵 화를 낸다. 그도 힘들겠지만 그를 지켜보는 우리 집 선풍기와 나도 힘들다. 자다가 그가 지르는 고함이 고통스런 기억을 상쇄시키기 위해 몸이 터트리는 '에어백'이라고 생각하면 반갑게 들리려나.

평생 순탄하고 평온하기만 한 삶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마음속에 한 두 개의 다크서클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짙고 옅음의 차이가 있을 뿐. 어쩌면 '다크서클'이란 자신의 일을 충실히 수행한 사람이 받는 '확인 도장' 같은 게 아닐지.

웬만해선 남편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가 가끔 철없는 행동을 하더라도 나이 칠십이 될 때까지는 봐주기로 했다. 그가 이전에 내 마음에 새겨 놓은 여러 개의 다크서클이 지금은 그를 지키는 '마패'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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