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시인 안도현

아이보다 훌륭한 시인은 없다시인이란 아이의 시절로 돌아가지 못해 안달하는 어른이거나 펜을 들고 겨우 아이의 흉내를 내보는 자다아예 아이 흉내 내기를 포기한 시인들도 있다그들은 언어에다 겉치레하는 수사에 사로잡혀 있으며, ‘추억’, ‘고독’, ‘상념과 같은 관념어를 시에다 남발하고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을 그럴싸하게 구사한다가짜 시인들이다.

요견 찔레고 조건 아카시아야잘 봐꽃은 예쁘지만 가시가 있지?”

아빠가 일곱 살짜리 딸에게 친절하게 설명한다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빠근데 찔레랑 아카시아는 이름에도 가시가 있는 것 같아.” 나무 이름에서 된소리()와 거센소리()를 재빨리 발견하고 그걸 가시의 뾰족함과 단번에 연결시키는 것이다기가 막혀 샘이 날 정도다튤립나무하고 쥐똥나무는 가시가 없거든 하고 아이를 골려주고 싶어진다그러가나 말거나 이 어린 시인은 또 다른 통찰력을 과시한다.

규연아저녁과 밤은 똑같이 깜깜하니까 같은 거지?” 하고 아빠가 묻자,

다르지저녁밥 먹을 때가 저녁이고 잠잘 때는 밤이지.” 아이는 그것도 구별하지 못하는 아빠가 한심했을 거다이 꼬마 시인은 박성우 시인의 딸인데엄마도 시인 권지현이다가족 셋 중 딸이 갑이다바다에 데려간 날 아이가 말했다.

바다가 생각보다 얇네.” 아빠가 받았다.

그래키가 크면 좀 더 두꺼워 보일 거야.” 그래서 아빠는 아이를 안고 바다를 보여주었다나.

 

매화치 안도현

매화의 은은하고 헤프지 않은 향기를 암향(暗香)’이라 한다중국의 시인들은 눈 속에 피는 매화의 절개를 옥골방혼(玉骨氷魂)’이나 빙기옥골(氷肌玉骨)’로 표현하면서 칭송했다옛사람들은 매화를 통해 맑고 고고한 정신에 이르고자 했던 것이다퇴계 이황도 매화를 끔찍이 좋아한 바보였다. ‘매화치(梅花痴)’라고 옆에서 수군거려도 개의치 않았다어떤 시에서는 매형(梅兄)’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매화를 형으로 받들었다퇴계는 늙어 초췌해진 자신의 얼굴을 매화에게 보일 수 없어 아래채로 화분을 옮기라고 할 정도였다사랑하는 대상에게 치부를 보일 수 없었던 것.

 

열흘 가는 꽃 없다고 말하지 말라(휴먼앤북스)는 퇴계의 매화시를 모은 시집이다이 책을 번역해 엮은 전북대 김기현 교수에 따르면 매화를 소재로 쓴 퇴계의 시는 모두 백일곱 편에 이른다일생 동안 이처럼 매화에 집중해서 많은 시를 쓴 시인은 없을 것이다. 24행이나 되는 어떤 시에서는 행마다 ()’ 자를 넣어 시를 지은 적도 있다퇴계와 단양에 살던 기생 두향과의 러브스토리의 매개체 역시 매화다이를 실감나게 그린 소설이 최인호의 유림(열림원)이다퇴계는 1570년 음력 12월 8일 일흔 살을 일기로 생을 마쳤다세상을 떠나는 날 그는 매화분에 물을 주라 당부하고 병석에서 꼿꼿이 일어나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혹독한 겨울을 통과해보지 않은 자는 이른 봄 매화 향기를 맡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대밭 안도현

대밭에 푸른 댓잎들이 대나무에 꼭 붙어살고마른 댓잎들은 바닥에 저희끼리 사각사각 두런거리며 살고아침이면 꽁지 짧은 참새 떼가 울음소리 왁자하게 흩뿌리며 살고대낮에는 심심할 때마다 한량처럼 구성진 노래 부르며 산비둘기가 실고새들이 일하러 떠난 고요한 대밭에는 새똥들이 눈을 말똥말똥 뜨고 모여 살고저녁에는 하루 종일 들쥐 한 마리 잡아먹지 못한 족제비가 그 긴 꼬리로 등허리를 툭툭 치며 기어들어와 살고족제비 발소리를 들은 뱀이 더 축축하고 그늘진 곳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는 대밭에는 모기가 마을에서 집단 이주해와 대규모로 부락을 형성해 살고돈 떼이고 집 잃고 처자식 잃은 바람이 옷 한 벌도 없이 살고헛기침만 하다가 날을 세우는 푸른 달빛이 사글세도 내지 않고 들어와 살고여름내 꺼내 먹어도 잇속까지 서늘한 김칫독이 땅을 파고 살고대나무 빈 마디 속으로 도망가 방을 얻고 싶은 청춘의 애타는 마음들이 살고첫 키스의 두근거리는 심장이 살고사금파리와 유리 조각과 삭은 고무신이 살고굴뚝에서 피어올라 정처 없이 허공을 떠돌다가 갈 데 없는 연기가 몰래 스며들어와 살고전쟁 통에 다급하게 몸을 숨기던 쫓고 쫓기던 발소리들이 살고숨죽인 침묵이 눈치 보며 살고북쪽으로 더 이상 북진할 수 없는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이 살고, 100년에 한 번 핀다는 대꽃이 나라가 망하거나 말거나 꽃을 피우려고 기를 쓰고 대나무 속에 웅크리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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