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다 고경서(경숙)

 

 

 

밤바다와 마주선다. 어둠 속이라 바다는 보이지 않고, 광포한 파도소리만 고막을 때린다. 여전히 강풍에 장대비가 쏟아진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설문대할망이 빠져죽은 가마솥처럼 들끓는다. 제 어미를 먹어치운 자식들의 비통한 울음인지 모를 파도소리에 꼼짝없이 갇혀있다. 갯바위를 치대며 밀회를 즐기던 하르방도 어디론가 몸을 숨겼다. 신들의 암투가 아니고서야 이런 야밤에 길길이 날뛰며 돌진해온 바다가 나를, 내 잠을 사정없이 집어삼킬 이유가 없다. 그리움의 바다가 악천후 속에서 제대로 울고 있다. 먹먹한 가슴으로 뛰어든 아우성이 낯설면서도 경이롭다. 이곳은 큰엉 해안이다. 밤늦어서야 찾아든 숙소다.

새벽녘에 갑자기 폭풍경보가 발효되었다. 조천해안도로를 타고 김녕 서포구, 산양 검은 모래해변, 월정리를 지나오면서 산더미만한 물너울을 꿰찬 채 천천히 달렸다. 거친 파도소리가 해안에 가까워지면서 가속이 붙어 바람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그러던 바다가 섭치코지서부터는 더 난폭해졌다. 거대한 물너울이 깎아지른 절벽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졌다가 하나로 뒤엉켜 뭉쳐지면서 물기둥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장쾌한 파도소리로 날아올랐다. 내가 바다를 보는 게 아니라 진노한 자연이 나를 결박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길 위에서 우연히 의외의 풍경을 만나면서 특별한 감동으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어쩌다 살풍경 속으로 서서히 동화되고 있었다.

우르르 쾅쾅,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달려온 파도소리가 발밑에서 곤두박질치다가 위아래로 곧게 뻗치는 날카로운 파열음을 남기고 종적을 감춘다. 어둠을 깨치는 황홀한 벽파, 풍랑이 거세다. 허공을 향한 기세가 심상치 않다. 제 살을 찢는 신음소리가 나를 팽팽한 긴장감으로 몰아간다. 철썩, 철썩거리는 소리가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들린다. 바람으로 인해 이미지가 달라지는 바다처럼 내안에서 억압받는 욕망이 자유와 반란을 꿈꾸는 내밀한 움직임으로 느껴진다. 아우성은 생의 뜨거움이 외부로 빠져나오면서 감당하지 못한 속내로 비춰진다. 시간과 시간의 틈새에서 우르르 쾅쾅. 포효하는 파도소리로 뜨겁고도 치열한 삶을 화폭에 담아내고, 산화한 화가의 그림 한 점이 검은 수면위로 부상한다.

마크 로스코의 레드이다. 예술의 전당에서 섹션을 설치해 놓고, 관람자에게 유일하게 사진촬영을 허용한 작품이다. 사각의 화면은 선과 면으로만 간결하게 표현했다. 게다가 다양한 색으로 칠해진 전시작품 중에서 이 그림은 단연 돋보였다. 한 가지색이 변화무쌍한 빛으로 꿈틀거렸다. 사방이 붉은 색으로 뒤덮였다. 핏빛선혈이 낭자하다. 잉걸불이다. 지구의 불덩이인 화산을 품은 듯하다. 땅 속 마그마가 외부로 폭발하기 직전, 내부에 응축된 에너지가 부글부글 끓는 형상이랄까.

"언젠가 블랙이 레드를 집어삼킬 것이다"라고 설파한 작가의 숨은 의도가 짙게 배인 작품이다. 고뇌와 격정, 열망과 광기를 예술적 영감으로 나타낸 화가의 심리상태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였음은 물론이다. 왕성한 생명력으로 충만한 이 그림이 자살로서 생을 마감한 유작이라니 아이러니했다.

"관람자와 내 작품 사이에는 아무것도 놓여서는 안 된다. 내 작품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침묵이다."라는 말을 남긴 그의 작품들은 침묵을 배후로 하고 있었다. 어둡고 축축한 시간 앞에서 말이나 소리를 내면에 품고 있는 예술가의 고독한 생애로 읽혀졌다. 인생의 바다에서 바람 불고 물결치는 순리대로 살아온 내게 던지는 이 말의 아우라가 참으로 심오하다. 그것도 가장 낮은 바닥에서 수없이 깨지고, 무너지다보면 어둠과 빛, 침묵과 아우성, 고요와 웅변이 괘를 같이하는 것 같아 의미심장해진다. 침몰한 내 안의 절망과 분노가 그림에 빨려드는지 아니면 나를 그림 속으로 빨아들이는지 모를 뜨거운 감정의 물결에 휩싸이고 말았다.

예술이 세상의 경이로움에 환호하며 내밀한 지락을 교감하는 것이라고 볼 때 야성의 파도소리와 그림 속 불타는 빨강은 나와 화가의 못다 펼친 꿈이거나 욕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비장해진다. 그가 남긴 분화구 앞에 주저앉아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어둠의 심연에서 마그마처럼 흘러내린 욕망으로 점점 가벼워진 몸이 새롭게 요동치고 있었다. 생은 파도타기였다. 그것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동안에 숱한 말을 가슴에 품었어도 바깥으로 쏟아내질 못했다. 안으로만 울음을 삼켰다. 그래선지 여전히 무겁다.

다음 날 아침, 머리맡에 해식동굴을 베고 잠들었던 나를 막막한 단절감으로 후려쳤던 그 바다가 가볍게 뒤척인다. 간밤의 소란스러움이 관통한 구멍마다 움켜쥐지 못하고 놓아버린 시간들이 잔물결로 일렁인다. 파도소리에 찢겨진 상처가 마음에 걸려서일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만큼의 거리감으로 멀어져가는 수평선이 눈시울을 붉힌다. 활짝 열어젖힌 생의 뱃길을 스스로 끊고, 침묵에 든 불우한 거장이 수평선을 밀어내고 태양을 힘껏 들어올린다. 선홍빛 정염이 눈부시다. 눈으로 보여지는 그림과 그것을 들여다보는 내 마음이 일시에 출렁거린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바다처럼 안면安眠에 든 마크 로스코, 그도 신화속의 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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