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 / 이종화

 

북한산 끝자락. 골짜기 따라 남루한 가옥들이 옹기종기 군락을 이루고, 가난한 삶이 뱉어낸 고단한 숨결은 골목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꼬불꼬불 길을 냈다. 사슴 눈망울 같은 눈송이가 좁디좁은 길을 순식간에 덮어버리면, 늙은 가로등은 노란 눈을 슴벅거리며 졸음 속에 긴 겨울밤을 헤매곤 했다.

우리집이 그 마을에 둥지를 튼 건 내가 대학을 마칠 무렵이었다. 새 아파트는 복작거리는 시장 끝에 있었다. 버스를 타려면 시장통을 꼭 지나야 했다. 이발소와 문방구, 중국집과 참기름집, 생선가게와 떡방앗간, 없는 것만 빼고 다 있다는 만물상. 정겹게 어깨를 맞댄 가게들. 사람들은 그렇게 삶과 삶을 잇대어 온기를 지폈다.

나는 성당 합창단을 해 보기로 했다. 의미 있게 대학 시절을 마무리해보고 싶었다. 주말이 되어 성당에 갔다. 어느 여름날 오후였다. 삐걱거리는 문을 조심스레 밀자 노랫소리는 더 가까이 들렸다. 우리 성당은 울림이 좋았다. 낡고 초라하긴 해도 내벽 하나만큼은 볼록볼록 솟아 있었다. 십여 명의 청춘이 오르간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락이 멎고, 하나둘 내 곁에 다가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서먹함은 금세 사라졌다.

그때부터 일요일 오후면 성당에서 지냈다. 저녁 무렵 시작되는 청년미사를 준비했다. 성가를 연습하며 단원들과 순대와 떡볶이를 나눠 먹기도 하고, 미사가 끝나면 성당 뒤편에 있는 시장에서 돼지껍데기를 사이좋게 구워 먹곤 했다. 단원들은 어느 식당에 가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주방에 들어가 주인의 일을 거들고, 들붐비는 날이면 간단한 음식 정도는 직접 해 먹었다. 밤이 깊으면 술맛도 깊어졌다. 취한 청춘들은 자주 울었다. 서로 토닥이고 안아주며 힘겹던 한 주를 떠나보냈다.

성가대라 해도 노래 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 단원들은 성당이 좋아 친구가 좋아 온 것 같았다. 거동이 불편한 단원들도 몇 있었다. 말이 어눌했던 한 친구는 늘 훌쩍이며 노래했다. 온몸이 마비된 채 종일 누워있는 어머니에게 짜증 냈던 자신이 미워져 자꾸 울었다. 뚱뚱한 파바로티도 있었다. 성악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 정육점에서 일을 하며 노래도 배운다 했다. 신부님에게 시집가긴 틀렸으니 군인과 결혼해야겠다던 쾌활했던 내 친구는 알고 보니 동생에게 엄마 같은 누이였다. 나도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내 친구들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2월이 되자 크리스마스 준비로 바빠졌다. 성가도 연습했고 캐럴도 연습했다. 손카드를 만들고 손글씨로 덕담을 썼다. 뒤풀이 자리. 성가대 맏형이 다가와 정답게 술잔을 건넸다. 여기서 오래오래 같이 노래하면 좋겠다고. 군대도 잘 다녀오라고. 우린 건배했다. 그 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단원들은 멀리 빈소를 찾아왔다. 군대 있을 때도 편지로 나를 응원해줬다. 그러나 제대하고 나는 성가대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핑곗거리는 많았다. 그때 나는 꽃이 되고 싶었다. 얼마 뒤 그 동네를 떠났고, 여태 그들을 잊지 못하며 산다.

꽃과 풀잎은 동전 한 닢으로 구분된다. 인색한 꽃과 넉넉한 풀잎. 꽃에게 동전 한 닢은 보잘것없으면서도 남에게 주긴 아까운 무엇이었지만, 풀잎에게 그 한 닢은 아주 소중하기에 누군가에게 기꺼이 내줄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꽃이 되려고 했던 나는 그들에게 한 닢도 주지 못했고, 그들은 우리가 만났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각자 한 닢씩 모아 동전 한 아름을 내게 선물했다. 그때 나는 꽃이 되려고만 했던 풀잎이었고, 그들은 꽃보다 아름다운 풀잎이었다.

우린 모두 꽃이 되고 싶어 한다. 꽃이 되려고 나는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학교 친구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경쟁을 하게 되었다. 좁은 문을 지나 또 다른 좁은 문 앞에서 우린 재회했다. 산다는 건 경쟁이고, 삶의 목적은 꽃이었다. 살면서 점점 선명해지는 게 있다. 내가 공부한 이유는 꽃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결국 ‘풀잎’이 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저녁이면 직장인들은 집으로 가지 않는다. 누군가와의 관계 속으로 도망을 치고, 혼자서는 견딜 수 없는 불안과 고독을 술로 달랜다. 처음 만난 관계도 학연으로 한 번, 지연으로 또 한 번 묶어 결국 계파라는 체로 걸러내어 멋지게 네트워크라 불렀다. 직장 생활은 이 네트워크에 종속되느냐, 이걸 초월할 수 있느냐에 따라 크게 갈렸다. 사람들은 그 네트워크 안에 꽃이 되는 열쇠가 있다고 믿었다. 수많은 명사(名士)가 이를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란 집을 제대로 짓지 못한 사람들은 네트워크를 떠나면 섬처럼 살았다.

가난을 비우고 정을 마시던 정릉동 성가대. 꽃이 되고 싶던 내게 우리 단원들은 스승 같은 풀잎이었다. 삶은 얼마나 정답고, 얼마나 가치 있으며, 얼마나 아름다운가. 꽃은,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피우는 것이란 걸, 누군가에게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어나는 것이란 걸 알게 된다. 풀잎다운 풀잎으로 누군가와 꽃을 피우는 풀잎. 주연은 그런 넉넉하고 준비된 조연에게, 운명이 건네는 ‘뜻밖의 꽃다발’이라는 걸 문득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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