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를 부르다 / 이양주

“청조(靑鳥)야 오도고야 반갑다 임의 소식(消息)······.”

제자가 소리 선물을 한다. 옛 시에 곡조를 얹어 부르고 있다. 청아한 목소리에 예쁜 새 한 마리 푸른 날갯짓 하며 허공 속에 고운 선을 긋는다. 노래하며 시를 소리로 풀고 있으나, 저만의 소리로 시를 다시 쓰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아이가 지닌 맑은 기운이 내게 전해온다. 차분하고 긴 호흡이 담긴 노래여서일까, 나의 호흡도 마음의 템포도 느려지며 편안해진다. 노래를 끝낸 제자의 얼굴이 말가니 평온하다.

“무얼 느꼈니?”

∙노래를 부르는 동안 주변의 소음들이 끊이지 않았다. 바로 옆 연습실에서 피아노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고, 사내아이 하나는 오랜만에 온 선배 누나가 궁금하여 들락거리기도 했다. 집중하여 편안하게 부를 수 있도록 미리 주변을 정리해주지 못한 것이 아쉽고 미안했다. 다행히도 제자는 별 동요 없이 중심을 잡아나갔다. 반쯤 감긴 아이의 실눈을 보며 나도 눈을 감았다. 밖으로 향하던 시선이 안으로 들어가 자리 잡는다. 곡이 흐를수록 자신의 속으로 깊이 들어가 흔들리지 않았기에 나도 그 음악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 갈 수 있었다.

“제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공이 쌓였구나. 고요 속에 있었던 게야.”

혼자서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건강을 잃지 않고 지내준 것만도 고마운데, 희망했던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고 부모님이 말한다. 선생님이 늘 지켜주고 격려해준 덕분이라며 인사한다.

“음악이 지켜주었지요. 어질고 이로운 음악이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 격려하게 도와주었지요.”

우린 늘 흔들리며 산다. 흔들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린 제자도 객지에서 저 혼자 수많은 흔들림과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 흔들림이 밖에서든, 안에서 비롯되었든 중심이 없으면 전체가 흔들리고 만다. 늦은 밤 수화기 넘어 들리던 아이의 힘없는 목소리가 나를 아프게 하곤 했다.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세상에 길은 많았지만 정작 나다운 길은 보이지 않았다. 내 안에 그 길이 있을 터인데, 밖으로 사람 속으로 길을 찾아 헤매었다. 거리의 불빛은 밝았으나 나는 어두웠다.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리고 싶었지만 혼자 거꾸로 걸으며 부딪히는 기분이었다. 행여 그 길에서마저 벗어날까 봐 나는 고개를 쳐들며 고독의 이름을 불렀다. 고독이라도 없다면 내가 흩어질 것 같았다. 나는 고독으로 나를 팽팽하게 당겼다. 그러나 고독은 완전하지 않았다. 내겐 방황도 고독도 아픔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때 소음과 매연에 찌든 거리를 헤치고 들려온 노래 한 줄기. 레코드 가게에서 고 김월하 선생의 시조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요하면서도 평화로운 그러면서도 당당함이 느껴지는 기운 있는 소리였다. 번잡했던 주변이 온몸에 쏟아지는 소리의 폭포로 갑자기 사라졌다. 폭포 속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소리의 폭포가 일순간 멈추며 사방이 고요해졌다. 폭포 한가운데는 고요가 있었다. 고요 속에 홀로 우뚝 선 느낌. 그 고요의 느낌과 함께 내 속에 정가(正歌)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숨의 노래. 평소에도 혼자 있을 때면 노래를 즐기지만, 천천히 온 숨으로 부르기는 처음이었다. 목숨은 숨을 쉬는 것이다. 나는 깊은 숨을 느끼기 시작했다. 호흡과 함께 내 안의 중심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나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표현한다는 건 얼마나 가슴 시원한 일인가. 그냥 내뱉는 소리가 아니라 속의 말 천천히 풀어내다 보니 무겁던 내가 어느새 가벼워져 있었다. 마음속의 들끓는 소란도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로움도 내가 나를 듣고 있기에 괜찮았다. 처음엔 느려서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느림이 더 편하고 좋았다. 느린 것은 거짓이 없다. 정직한 음악. 천천히 드러나기에 잘 들리고 잘 보인다. 마음이 불안하면 호흡도 짧아지고 소리도 불안하다. 때론 야속한 이가 노래 위에 앉는다. 감정선이 고르지 못해 소리가 흔들린다. 내가 들킨다. 즐거우면 소리도 덩달아 즐겁다. 이 모든 것을 들려주는 이도 듣는 이도 지켜보는 이도 자신이다. 선조들이 이 노래를 가까이 두고 수신의 도구로 삼은 이유를 알겠다. 나는 소리를 하며 나를 관(觀)하고 나를 다스리는 시간을 가진다. 아름다운 시에 마음을 얹어 노래하는 것도 귀한 즐거움이다. 소리의 붓으로 천천히 그림을 그린다. 무형의 붓이 그리는 그림은 사라지기에 더 아름답다. 하늘이 열리고 구름이 흘러가고 새가 날고 꽃이 핀다. 소리로 풍경을 부르고 풍경 속에 내가 앉는다. 나는 노래하며 내 속에 있는 고요와 천지간의 고요를 불러낸다. 고요와 함께 논다. 정가는 고요히 흐르는 강물을 닮았다. 강심(江心)을 바닥에 두고 수면 위의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변화도 있고 흔들림도 있만 고요한 곡조가 끝내는 무심함에 이르게 한다. 나도 흘러가고 너도 흘러가고 무심하게 가다 보면 함께 화엄의 바다에 이르지 않을까.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