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서 / 서숙 

화분을 돌보다가 그만 사고를 쳤다. 천리향의 실한 가지 하나를 부러뜨린 것이다. 좁은 베란다에 촘촘히 들여놓은 화분들 중에서 창문 쪽의 군자란을 살피고 돌아서다가 그만 천리향 가지를 건드린 모양이다. 나는 늘 나의 과체중이 유감스럽지만 이런 경우에는 가책마저 든다. '아, 살을 빼야 하는데. 날렵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그렇지만 평소에 맛있는 음식을 외면할 수 없는 나의 왕성한 식욕은 이런 반성을 잘도 묵살한다.

부러지긴 했어도 아직은 본 줄기에 붙어 있다. 속살을 드러낸 가지를 떼어내려다가 아무래도 애석해서 살려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식빵 봉지를 묶었던 은박 입힌 철사 끈을 가져와 가지를 제자리에 꼭 붙여 칭칭 동여매었다. 그러곤 하루에도 여러 번 잎이 시들지 않는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용케 잘 버티는 것이었다. 수액이 올라와서 치유가 되는 모양이었다. 다행스러웠다. 부목을 대지는 않았지만 깁스 처방이 주효했다. 대견한 가운데 혹시나 하여 달포가 지난 지금도 은색 테이프를 풀지 않고 있다.

오래전에 충북 옥천에 갔다가 유명한 이원묘목시장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기념으로 사 온 묘목이다. 여러 해 동안 몸피도 제법 불리며 봄마다 꽃도 실하게 피운다. 이름처럼 천리까지 간다는 향기도 진하지만 별을 닮은 꽃무더기도 해사하니 몽실하여 어여쁘다. 베란다에서 키우는 화초에는 일조량이 충분할 리가 없다. 그런대로 세파에는 시달리지 않으니까 안온한 환경에 맞추어 적응하는 모습이 다소곳하다.

3년 전에 백령도에 갔다가 바닷가 뽀족한 바위 틈새로 미끄러져서 넘어지는 바람에 오른팔을 부러뜨렸다. 뼈가 부러지면서 조직들을 찢어지게 하여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하고 깁스를 했다. 그 사고도 역시 나의 둔한 운동신경 탓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철심을 뽑지 않고 있다. 미련한 일이다. 그래도 입원하고 수술하는 절차의 되풀이가 영 내키지 않아서 다소의 불편을 감수하려고 한다. 손목에 이물감이 느껴지고 병뚜껑을 돌려 여는 일이 힘들다. 또한 섬세한 작업을 하기에 애로가 있다. 손으로 하는 일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는데 솜씨가 거칠어졌다. 바느질은 이미 손 놓은지 오래라서 그렇다 치지만 살림살이가 오밀조밀한 일을 할 때 마무리가 시원치 않고 작았던 필기의 글씨도 커졌다.

붕대를 감고 있는 천리향의 가지와 철심을 지니고 있는 내 팔이 처지가 닮았다. 부상병이 근근이 회복하여 불편하고 아쉬운 대로 일상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오래된 우리 집에는 그런 비슷한 경우가 흔하다.

가스레인지의 네 개 버너 중에 가장 커서 제일 많이 사용하던 것이 고장이 나서 쓰지 않은 채로 놔두고 있었다. 신통하게도 몇 년 후 저절로 고쳐져서 지금 잘 쓰고 있다. 아마 끊겼던 스타터의 접촉이 어떤 서슬에 다시 이어진 모양이다. 안식년이 길었던 셈이고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고치지도 바꾸지도 않고 그대로 둔 나도 어지간하다.

지어진 지 20년이 된 집의 여기저기가 노후한데 요즘은 특히 화장실의 타일 몇 개가 배가 불룩하다. 곧 떨어지려니 했는데 해를 넘겨도 그대로 붙어 있다. 처음에는 핑곗김에 낡은 욕실을 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물 닿는 데가 아니니까 타일이 없어도 무방할 것 같다. 뭔가로 카무플라즈하면 구태여 먼지를 피우며 수리한다고 수선을 안 피워도 될 것 아인가.

딸 애가 주워 와서 키우게 된 고양이 세 마리가 여기저기 할퀴고 뜯어놓은 벽지를 도배할 생각도 없다. 찢겨나간 부분들은 미술관의 포스터 등으로 가렸다. 사용한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냄비를 보며 "이렇게 물건을 오래 쓰니 나라 경제가 돌아가겠어?" 동생이 내놓는 지청구에도 나는 끄떡하지 않는다. 조그만 화초가 크게 자라서 큰 화분으로 분갈이할 때의 기쁨 속에서 헌 것, 부서진 것, 이런저런 낡은 것들에게 애착을 느끼며 살아간다.

지난여름, 유난히 더위를 참기가 힘들었다. 아마 나이 탓인가 보다. 감각은 무뎌진다는데 참을성에는 기력이 딸리는 것 같다. 내년에는 더 힘이 들겠지. 그냥 이대로 버티기도 버겁다. 오래된 집에서 오래된 살림살이와 가구를 그대로 둔 채 그냥저냥 변화 없는 하루하루를 고마워한다. 화장실 벽의 타일이 언제쯤 와르르 무너져 내릴까, 궁금하다. 주인 닮아서 굼뜬 행동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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