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집, 송석헌(松石軒) / 조현미 

집을 떠나는 것이 세계의 운명이 되어 가고 있다 - 하이데거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기왓장엔 버짐이 피었고 기왓골에선 와송이 자라고 있었다. 보(樑)와 기둥, 서까래와 난간에 세월이 먹물처럼 스며있었다. 대문은 버름했고 마루는 앙상했다. 수척한 지팡이와 고무신 한 켤레가 ‘아직 사람이 기거 중’이라는 듯 늙은 집을 지키고 있었다. 미명에 젖은 집의 표정은 무거웠고 주련(柱聯)속 글귀는 낯설었다. 마치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쯤 한 노인이 풍경 속으로 들어왔다. 갓과 잿빛 두루마기, 흰 고무신이 먼 옛날로부터 걸어 나온 차림새였다. 주름 깊은 표정이 그 집을 꼭 닮아있었다. 이윽고 지팡이를 쥔 노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긴한 용무가 있는 듯했다. 오경(五更)이 지난 지 얼마 안 된 시간. 불현듯 노인의 새벽잠을 앗아간 존재가 궁금했다.

우연히 그 집을 만난 건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듯하면서도 닮은, 민초들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참 좋았다. 젊은 주인공이 몸소 행하는 온고지신의 철학에 은연중 매료되었다. 그는 다름 아닌 그 집, 늙은 주인의 제자였다.

다큐의 여운이 가시기 전, 검색엔진에 ‘송석헌’과 ‘권헌조’ 란 키워드를 넣었다. 몇 편의 글과 사진이 떴고 그것들은 대개 한 권의 책에 의존하고 있었다. 사진과 토막글을 엮은 포토에세이는 나를 단박 흡인했다. 삼백여 쪽을 읽는 내내 집과 노인과 나는(어쩌면 글쓴이도) 하나였다.

그날 이후 무시로 그 집의 영상이 찾아왔다. 비운 듯 알 수 없는 기운으로 가득 찬 노인의 눈빛과 늘 함께였다. 좀 더 가까이 집과 노인을 감각하고 싶었다. 오가는 데만 한나절, 꼬박 하루가 걸리는 여정이었으나 즉시 행장을 꾸렸다. 그것은 어쩌면 사명 같은 것이었다.

양반의 고장이자 선비의 고장이라는 봉화•안동은 예부터 명현달사(名賢達士)가 많기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조선지재 반재영남(朝鮮之 半在嶺南) 영남지재 반재안동(嶺南之才 半在安東)*이란 말이 나왔을까. 이를 방증하듯 청량산 일대엔 최치원과 김생, 퇴계 등 선인들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뿐 아니라 봉화는 전국에서 자연부락과 토속지명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닭실과 물미, 꽃내, 살피재, 앞결, 장그레미, 선돌 등의 순우리말은 그 자체로 얼마나 숫저운가. 수차례 행정구역 개편의 와중에서 살아남기까지 토박이들 입에 무수히 오르내렸을 터, 이는 봉화의 지형과도 무관하지 않다.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와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봉화, 읍에서 머잖은 곳에 그 집 송석헌이 있었다.

閉자로 입을 다문 대문 앞에서야 결례를 깨닫는다. 제아무리 국가지정문화재라지만 엄연한 살림집이 아니던가. 방문을 여쭙는 전화 한 통을 빠뜨렸다. 돌아갈 길이 아득한데, 슬며시 밀자 入자로 열리는 문. 내내 어떤 보이지 않는 기운과 동행하는 느낌이더라니, 아지 못할 기의 실재를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집의 첫 느낌은 고아하면서도 돌올하다. 산비탈을 깎는 대신 기단을 쌓아 집을 올린 까닭이다. 이층의 기단은 족히 열 자가 넘어 보이고 마루도, 디딤돌도 여느 반가보다 높다. 삼백 년 전, 굽어보는 이와 우러르는 이의 간격은 훨씬 컸을 터, 성현들의 문장을 헤아리듯 집의 행간을 읽는다. 우뚝한 사랑채에서 영남 양반의 꼿꼿한 자존을, 천추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선비정신을 본다. 송석헌(松石軒)이란 현판이 그지없이 어울리는 집이다.

중문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사랑채를 잇는 평자 난간은 계단을 내려와 亞자형 무늬로 갈아입는다. 그곳에 고택의 명물인 영풍루(迎風樓)가 있다. 한옥에서는 여간해 볼 수 없는 복층구조, 18세기엔 한 채의 파격이었겠다. 이 층은 본디 응접실로 쓰였다니 ‘바람을 맞는 집’이란 얼마나 용도에 걸맞은 이름인가. 다섯 개나 되는 문을 통해 각지의 바람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수많은 시인묵객이 시국을 논하고, 때론 풍류를 나눴으리라. 문을 열면 홍안의 선비 하나, 바람이 갈아놓은 묵향 찍어 푸른 문장을 쓰고 있을 것만 같다.

사랑채가 관직에서 물러나 옛집에 안거한 노인을 닮았다면 영풍루가 주는 느낌은 호방하면서도 젊다. 亞자형 교란으로 멋을 부린 것하며, 사랑채보다 아래에 둔 처마는 마치 젊은이가 어르신께 예를 올리는 형상이다. 언뜻 이질적인 듯 묘한 조화에서 오백 년 전 퇴계와 고봉의 아름다운 우정을 생각한다. 당대 최고의 노학자는 자신보다 무려 스물여섯 살이나 어린 선비의 반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지행합일(知行合一), 행동이 따르지 않는 앎은 죽은 사유다. 오백 년을 이어온 실천의 끄트머리에 바로 그가 있었다.

마지막 선비이자 유학자, 단 한번 양복을 입지 않았고 집을 떠나 생활한 적이 없는, 매일 환후 중인 양친의 대변을 맛보고 차도를 살피던, 조석으로 부모님의 산소를 찾아뵙고 ‘출필곡 반필면(出必告反必面)’을 이승 소풍 마치는 날까지 행했다는, 유학의 본질을 ‘착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던……. 끝내 말줄임표로 생략한 수식은 그 사람, 권헌조란 이름에서야 마침표를 찍는다.

안동 권씨 검교공파 사복재 6대손 동애(東涯) 권헌조 옹. 삼백 살이 넘은 집에서 여든세 해를 살던 그도 육 년 전 산중턱에 둥근 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억 안에 사는 그는 여전히 ‘착한 사람’이었고 검소하면서 부지런했다. 마치 『효경』의 실천서 같은 생을 살았으니 높은 학문과 뛰어난 문재(文才)는 그 많은 수식어 중 극히 일부일 수밖에.

송석헌이 단지 삼백 년이 넘은 집에 불과했다면 나의 여정 또한 숱한 고택 기행의 하나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허나 그 집의 고갱이는 담장 너머에 있다.

야트막한 담장을 돌아 산길로 들어선다. 조붓하고 단아하나 여든 넘은 노구로선 벅찬 길이다. 애오라지 한 가지 신념으로 닦은 그 길을 한 사람을 생각하며 오른다. 길이란 곧 먼저 간 사람들의 흔적이 아닌가. 행인이 있는 한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더 이상의 적멸은 없다. 밭은 숨을 고른 뒤 가만 그의 자취를 더듬는다.

옆으로 길게 누운 人자가 두두룩한 봉분을 그느르고 있었다. 어찌 보면 봉분이 人자를 보듬고 있는 듯도 했으나, 어떤 각도로 보든 仁자 형태. 거기 그의 행적이 고스란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조석으로 문안을 잊지 않았고, 출타 시 고하고 돌아와 사뢰기를 부모님 생전인 양 행했다. 곡진한 마음에 풀이 누웠고 올곧은 정신은 길로 현현했다. 그의 삶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효를 행하는 데 있었다.

옛말에 효는 만덕의 근원이요, 백행의 원천이어서 어버이를 잘 섬긴 뒤라야 인(仁)을 이룬다고 했다. 인이란 서로 공감하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것이니 관념을 떠난 실재, 그것은 오로지 실천으로 구체화된다. 그의 삶은 가히 성인(成仁)에 가까운 것이었다.

현대인을 일컬어 효도가 부재한 세대라 한다. 자식을 효자로 키우기 위한 유일한 비결은 스스로 효자가 되는 길뿐. 멀어질수록 크게 다가오는 고택에 읍(揖)한 후 빌어본다. 대처를 배회 중인 젊은 혼들의 귀향을. 보다 많은 이들이 유교적 삶의 제유로서의 옹을, 仁과 孝의 기표적 장소로 송석헌을 호출하기를. 

* 봉화와 안동은 이전에는 같은 권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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