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위 하우스 / 최종희 

숨을 쉬기도 눈치가 보일 지경이다. 지금 이 순간에 기침이라도 하면 공중질서를 어지럽히는 예의 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유리 벽 안의 움직이는 물체를 찾느라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드디어 검은 적막 속에서 긴 부리에 병아리와 비슷한 체형의 녀석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렵게 발견한 기쁨도 잠시, 환호성 한번 지르지 못하고 옆 사람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그도 그럴 것이 과일 키위의 겉모습과 닮아 키위라고 불리는 이 새를 만나는 절차가 은근히 까다롭다. 안내자는 어두컴컴한 밀실로 들어오기 전에 고요와 어둠을 좋아하는 새라는 설명을 곁들이면서 요구사항이 꽤 많았다. 이 새가 뭐기에 바다 건너 먼 하늘을 날아온 손님들에게조차 '촬영금지'와 '정숙'을 강조하며 유난을 떨어댄단 말인가.

키위는 뉴질랜드에만 거주하는 이 나라의 국조다. 한때는 활기찬 날갯짓으로 남태평양을 가로지르며 더 넓은 창공이 삶의 터전이었던 적이 있었다. 언제부터였던가. 먹이가 풍족하고 포식자가 없어 날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유럽인들이 뉴질랜드 땅을 밟기 시작하자 키위 새의 천적인 고양이, 족제비들도 함께 몰려왔다. 그땐 이미 자신들의 조상이 하늘을 훨훨 날아다녔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뉴질랜드 정부는 천적들에 의해 멸종의 위기에 처한 국조를 보호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키위 하우스는 알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부화시켜 사라져가는 그들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보료이다.

나는 지금 키위 하우스를 짓고 있다. 과속으로 달리는 삶 때문이었는가. 날개가 있지만 날지 못하는 새처럼, 사유할 능력이 있는 인간이면서 의식의 날개를 접어버렸다. 정해진 제도에 순응하며 현실을 따라잡느라 급급했다. 그러다 삶은 조금씩 느슨해졌지만, 가슴은 늘 허기가 졌다. 휴대폰 배경에 '자아 찾기'라는 글귀를 새겨놓았다. 원대하지 않아도 사고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친구 따라 거름지고 장에 가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스스로 자아를 깨닫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반백 년의 세월을 넘긴 나이에 사회에 눈을 뜨고자 하는 열망으로 석사과정의 문을 두드렸다. 졸업 후, 좀 더 깊은 학문 세계에 덜컥 진입했다. 배움이 길어짐에 따라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고에 균열이 생겼다. 익숙한 것들에 대해 새롭게 더듬어 볼 필요를 느꼈다. 내 생활세계는 가부장적 전통이 유별난 지역이다. 대부분의 정서가 기존의 지배적 사유 습성이나 생활양식의 옷을 벗기를 거부하고 변화를 두려워한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우리를 향해 삿대질을 해대기 일쑤고 전국적 왕따의 오명이 졸졸 따라다닌다.

가족집단의 울타리에서 ​출발하여 지역공동체를 지난 국민국가로 시선을 돌리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났다. 의심을 유보하는 세계에 살고 있었는데 갖가지 물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국민국가가 생겨나기 이전에는 '초월적 신'이 절대적인 역할을 한 종교 공동체였다.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종교 서사가 깨어지고 국민국가가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세속의 신'으로 태어났다. 그렇다면 신앙인이 초월적 존재의 신을 무조건 숭배하듯, 국민은 국가라는 세속적 존재의 신을 맹목적으로 추앙해야 하는가.

주변인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지난날의 내 모습을 읽는다. 크고 작은 사회 문제들에 대한 반응이 이구동성이다. 여전히 왕조 시대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어렸을 적 달달 외우던 '국민교육헌장'이 국가라는 세속적 신을 섬기는 성경 말씀으로 작동한 듯하다. 지난 시절에 받아온 획일화된 교육방식이 신앙심으로 자리 잡아 큰 효과를 발휘한다. 그들과 목소리를 섞다 보면 갈등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한판 붙자며 화끈하게 도전장을 내밀고 싶을 때도 있지만 아직 내게 그럴만한 역량이 부족하다. 허공을 맴도는 언어가 귓전을 두드릴 때면 차라리 침묵을 선택해 불편한 심경을 꼭꼭 감춘다.

자아의 날개가 뭉뚝해져 회생할 기력이 없다고 아우성을 쳐대면 배움의 길에서 벗어나 현실에 안주하고 싶을 때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의 또 다른 자아가 목 놓아 통곡할지도 모른다. 홀로코스트 대학살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독일의 아이히만은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전혀 뉘우침이 없었다. 관료로서 국가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했을 뿐이라는 항변이다. 이에 한나 아렌트는 '사유의 부재'가 유죄임을 선언한다.

자아 찾기는 사멸의 위기에 처한 나를 되살리는 일이다. 뉴질랜드 키위 하우스가 키위 새의 멸종을 막아 준다면, 내 마음속의 키위 하우스는 사유를 키워가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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