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과 수제비 / 김순경

 

 

대문을 들어서자 작약이 먼저 반긴다. 며칠 전부터 기다렸다는 듯 곱게 단장하고 활짝 웃는다. 탐스러운 꽃송이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핀 적도 있지만 몇 해 전부터 잎도 나지 않아 생명이 다한 줄 알았다. 손바닥만한 밭 상추도 인기척에 놀란 듯 일제히 고개를 치켜든다. 지난겨울 거름을 듬뿍 주었더니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성하다.

 

집안은 이미 떠들썩하다. 먼저 도착한 동생들과 조카들이 창문을 활짝 열고 반갑게 맞는다. 준비해간 김밥을 먹자마자 조카들이 타 온 커피를 마시며 오늘 해야 할 일을 설명하고 역할을 정했다. 담장에 페인트를 칠하는 조와 굴뚝을 부수고 방고래를 뚫는 조로 나누고 막내와 누님은 방 청소와 책장 등을 정리하고 점심을 담당하기로 했다. 늘 그랬듯이 임무를 부여하고 관리 감독하는 작업반장이 되어 공구와 재료를 분배하고 일사불란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이쪽저쪽을 기웃거렸다.

 

문제는 굴뚝 공사였다. 언제부턴가 불이 잘 들이지 않고 밖으로 밀려 나오는 바람에 아궁이에 불을 지필 수가 없었다. 재를 퍼내고 안을 들여다봐도 별다른 대책이 없어 굴뚝 앞에서 한동안 서성댔다. 일단 부수고 고래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비좁은 공간이라 시멘트 블록을 깨는 작업부터가 난공사였다. 긴 대나무로 아궁이와 굴뚝을 수도 없이 쑤셔댔지만, 불만 지피면 굴뚝으로 가야 할 연기가 쏜살같이 아궁이로 몰려나왔다. 아무리 부채질해도 비웃기라도 하듯 바로 불길을 토해냈다. 반복되는 작업에 모두가 지쳐갈 무렵 굴뚝에서 연기가 살포시 피어났다.

 

담장 덮개를 칠하는 작업도 어려웠다. 팔순이 얼마 남지 않은 자형과 이순을 넘긴 동생의 꼼꼼한 성격 때문에 생각보다 훨씬 더뎠다. 하얗게 피어난 백화와 흙먼지를 제거하고 작은 붓으로 구석구석까지 칠하다 보니 붓놀림이 빠를 수가 없었다. 사다리를 사용하는 높은 부분에서는 더 느려도 재촉하지 못하고 지켜만 봤다. 붓이 지나가자 떨어져 나가고 파인 부분이 말쑥하게 단장되었다. 담 지붕만 칠했는데도 몇 달 만에 목욕하고 이발한 부잣집 선머슴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점심은 라면이었다. 그냥 라면이 아니라 밭에서 방금 가져온 부추와 꽃게가 들어간 특식이다. 이미 실력은 인정받은 주방장이지만 이번에는 콩나물이나 버섯 대신 새벽 시장에서 사 온 꽃게까지 넣었다며 막내가 너스레를 떤다. 열유체를 전공한 공학박사답게 물의 온도와 면발의 탄성에 대한 강의도 빠지지 않는다. 특별히 준비한 뚝배기에 가득 담긴 오동통한 면발 사이로 치솟은 하얀 꽃게 다리가 식욕을 돋운다. 모두가 장정이라 먹는 게 아니라 빨아들인다. 주방장이 돌아다니며 잽싸게 빈 그릇을 채워주다 보니 두 솥이 금세 바닥났다.

 

유년 시절의 여름이 생각난다. 마당에 펼쳐놓은 멍석에 열 식구가 앉았다. 논일을 마치고 들어온 할아버지와 형님이 먼저 자리를 잡으면 밭일과 소 먹이러 갔던 아이들도 밥상을 중심으로 모였다. 할아버지 상에는 식은밥과 수제비가 동시에 올라가도 아이들은 무조건 양푼과 사기그릇에 넘칠 듯 담긴 수제비가 배달되었다. 애호박과 감자 부추 등이 들어간 수제비는 미처 식기도 전에 빈 그릇이 되었고 용암처럼 치솟던 큰 솥도 바닥을 드러냈다. 기본이 두 그릇이고 한 그릇만 먹는 사람은 할머니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빈 그릇 채워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머니는 원래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아무도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국수를 삶았을 때나 추어탕을 끓였을 때도 식구들이 잘 먹는 모습만 보아도 즐겁다며 끝날 무렵에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상 치우기에 바빴다. 어떤 때는 밥을 먹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식구들의 밥상에만 치중하다 끝날 때도 있었지만 내색하는 법이 없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오직 많은 식구의 먹거리 준비에만 전념했다. 날마다 식성이 서로 다른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심사를 거슬릴까 노심초사할 뿐이었다.

 

일하는 동작이 오전과 사뭇 달랐다. 배가 너무 불러서인지 몸이 지쳤는지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한 시간만 하고 끝낸다고 소리 지르자 조금은 서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굴뚝 공사를 끝낸 정예부대가 페인트를 칠하는 작업에 투입되자 급물살을 탔다. 두 배 이상의 인원이 달려들자 진행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게다가 먹구름까지 몰려와 마무리 작업을 독촉했다. 일기예보에는 없던 작은 빗방울이 갑자기 떨어지는 바람에 나머지 부분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얼른 마무리 지었다.

 

껍질만 남은 집에는 다시 적막이 흐른다. 당분간 찾아올 사람이 없는 줄 아는지 햇살 가득한 마당에는 허락 없이 들어온 바람이 잠시 머물다 잦아든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신바람 난 고양이들이 한바탕 분탕을 치다가 멋쩍은 듯 쳐다본다. 밤마다 내리는 이슬로 단장하는 작약이 이별이 아쉬운 듯 다시 고개를 떨군다. 일 년을 기다렸다 만나는 견우와 직녀처럼 방실거리며 반갑게 맞아주는 장미도 내년을 기약하며 눈길을 돌린다. 햇볕이 들고 바람이 불면 다시 환하게 웃기를 바라며 대문을 닫는다.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 약간의 시차만 있을 뿐 하루살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수십억 년 한결같은 궤도를 돌고 있는 천체에 비하면 인간의 삶이야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에 터를 잡은 할아버지가 떠나면서 태어나고 자란 아버지와 형님들도 줄줄이 뒤따라갔다. 지난날 복작대며 살았던 기와집도 초가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졌고 앞 감나무와 대추나무는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좋고 힘들었던 시절의 기억이 희미해져 갈수록 그리움과 아쉬움이 가슴을 헤집는다.

 

누구에게는 오늘이 또 추억이 된다. 언젠가는 꽃게 라면을 먹으며 떠들었던 순간이 수제비 먹던 날처럼 환영이 되어 겹쳐질 것이다. 오늘 작업한 굴뚝과 담장이 무너지고 없어져도 라면을 먹던 모습만큼은 남는다. 어렵사리 모였던 충문당忠文堂 후손들이 각자 차에 올라 시동을 건다. 나도 차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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