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강을 건너고 / 김상립 

나는 대학 3학년 때, K대학교의 총 학생회장이었다. 당시 한국학생총연합회가 주최한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앞두고, 내가 탄 버스가 전복하는 큰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에 병원생활로 수 개월 동안이나 자리를 비운 관계로 많은 것을 잃었다. 이런 충격 때문에 우울증이 깊어져 하는 일 없이 술로서 날을 보낼 때가 많아졌다. 4학년이 된 어느 날 소규모 그룹으로 농촌운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던 사람들이 찾아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꺼이 함께하기로 했다.

계절은 어느새 가을이 되었다. 하루는 총장님께서 찾으셨다. 가서 뵈니, 며칠 전 한 모임에서 김 회장이 하고 있는 농민운동을 얘기했더니 함께 있던 스코필드 박사(Frank. W. Schofield. 1889~1970)가 큰 관심을 보이며 한 번 만나자 했단다. 박사님은 3.1 독립운동 당시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적극 참여하여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린 저명한 분으로 서울대학에 재직하고 계셨다. 총장님과 함께 동성동에 있던 외국인 교수 촌으로 가서 뵙게 되었다.

박사님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농촌운동을 보다 체계화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니, 장학생으로 캐나다에 유학을 가라 했다. 더욱이 퀘백주에 있는 성 프란시스 대학은 후진국 농업지원을 위한 좋은 프로그램도 있으니 졸업 후에 도움받을 수 있도록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까지 하셨다. 그리고 당신이 곧 캐나다로 들어가니 가는 길에 모든 서류를 갖추어, 내가 졸업할 때쯤 돌아올 테니 유학 준비나 잘하라고 당부하시었다.   

나는 하늘이 주신 기회이라 믿고 열심히 노력하여 꼭 훌륭한 성과를 내야겠다는 결의로 준비에 몰두했다. 이렇게 수개월에 걸쳐 열심히 대비하고 있었는데, 졸업식 날이 와도 아무 소식이 없다. 나는 본의 아니게 실업자 신세 되어 어렵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 난 기사를 읽었다. 스코필드 박사가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오기 위해 공항으로 나가다가 좌 심장 경화증으로 미국 월트리드 육군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따로 연락이 올 것이니 기다려보자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나 봄이 지나도 그뿐, 초 여름에 접어들어서야 박사님으로부터 제법 큼직한 엽서 한 장을 받았다. 내용은 연필로 쓰였는데 영문 글씨가 삐뚤삐뚤하고 글의 굵기도 일정하지 않았다. 또 글자가 군데군데 흐려져 손끝이 많이 떨린 흔적마저 역력하였다. 마치 이승의 삶을 시시각각 마감해가고 있는 어떤 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혼신의 힘을 다해 쓴 편지 같아서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용을 번역하면 대략 이렇다.

‘(앞은 생략), 내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자네의 유학 관련 서류를 찾았을 때, 이미 유효기간이 다 지나간 후였다네. 그러나 다시 서류를 구비하기에는 나의 건강이 허락하지를 않았네. 유감스럽게도 자네의 유학 계획은 취소될 수밖에,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네. 나는 평생을 살며 내가 했던 약속은 꼭 지키려고 노력했고, 솔직히 잘 지켜온 셈이었다네. 그러나 이유가 어쨌든 자네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내 생애에서 가장 큰 빚으로 남을 것 같네. 나는 한국을 그 어느 나라보다도 사랑했고, 한국의 청년들도 사랑했다네. 하느님께서 자네와 늘 함께하시리라 믿네.’ 원 세상에 이럴 수가, 소설보다 더 기구한 것이 사람 팔자라 드니…, 나는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지키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수 개월 후, 보건사회부의 특채시험 응시 기회를 얻어 용하게 합격할 수가 있었다. 근무를 시작한 지 2년쯤 된 어느 날, 상사가 찾아서 가 보니 생각지도 않은 제의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나환자(癩患者)들이 많이 있고, 저들은 각지에서 정착촌을 만들어 가축을 기르며 자립하려 애쓰고 있다. 우리 부(府)에서 관민 합작으로 사료공장을 지어 그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사료를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잘되면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가려고 한다. 우리 쪽에서 그 일을 맡을 사람이 필요한데, 당신 이력을 보니 축산대학 출신이고 농촌운동까지 하였으니 적격일 것 같은데,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실패한, 유학길이 떠올라, 보람 있는 일을 맡겨주셔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드리고 보름 후에 사표를 쓰고 그 일에 착수하게 되었다.

조치원에 공장 터를 잡고 착공식도 조촐하게 치르고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되었다. 공사 설계며 기계설비도 검토하고, 조직도 만들기 시작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1970년 3월 어느 날, 고급 요정 종업원이었던 정인숙 양의 암살사건이 일어나 한동안 세상이 떠들썩했다. 고위 관리들의 치정사건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지만, 수사는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아 총리를 비롯한 장관 4~5명이 교체되었고, 돌연 긴축예산집행이란 조처까지 나왔다. 하필이면 내가 진행하고 있던 사료사업도 대상에 포함되어 졸지에 자금조달이 막혀버렸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 아닌가? 저들끼리 벌인 일 가지고 왜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의 꿈까지 뺏냐 말이다. 이제 막 기초공사를 하던 자리에 서서, 나는 목놓아 서럽게 울었다. 나는 같이 일하던 후배들과 서울역 부근에 다 창고 하나를 빌려 축산물 도매상을 시작했다. 처음 하는 일이라 쉬울 리가 없었지만,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버텨냈다. 그러기를 1년, 보사부에서는 내게 다시 발령 장을 보내주면서, 저간의 사정을 이해하고 돌아와서 열심히 근무하라 했다.      

내가 20대 후반부터 고작 몇 년 사이에 이런 기막힌 일을 연이어 3번씩이나 겪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내 인생이었다. 누가 봐도 운명이란 말을 빌려오지 않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건들이다. 도대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러고 보면 내가 태어나서 30대 초반까지는 운명에 떠밀려 그냥 살아온 삶 같았다. 인생에서 운명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지 몰라도, 이제부터라도 그런 운명일랑 만나지 말고 내 의지대로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결과가 어떻게 되던 내 계획과 노력으로만 인생길을 가보자’고 마음을 굳혔다. 나는 출근하지 않겠다고 총무과에 통보하고, 도매상도 후배에게 넘긴 채, 밑그림도 없는 백지 위에 서서 신발 끈을 다시 조여 매었다.

그리고 반 백 년. 나는 그동안 사료산업과 축산업에 관련하며 생업을 이었지만, 옆에서 누가 도와줄 것을 계산하거나 행운이 올 거라 믿고 계획을 세우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유 없는 도움에는 지레 겁부터 났고, 행운처럼 찾아온 공짜에는 더욱 조심했다. 내 이름을 얻기 위해 남의 이름을 해코지하지도 않았고, 불로소득을 바라고 거짓 술수도 쓰지 않았다. 남들은 부동산으로 돈 번다고 목에 힘주고 다녀도, 나는 한 번도 집값 오른다는 곳을 찾아다닌 적이 없다. 그저 세월 따라 조용히 내려앉아 보통 사람 중의 보통 사람으로 사는 게 예비된 이번 생의 내 모습일 거라 생각했다. 덕분에 다시는 속절없이 두 손 들어야 하는 사건 앞에는 서지 않게 되었으니,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며 운명이란 말을 적게 쓸수록, 삶은 가벼워진다는 사실을 이제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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