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인간 / 최민자

 

시험 문제를 마음대로 내도록 한 철학 교수가 있었다.

한 학기 수업 내용 중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문제를 스스로 내고 거기에 맞는 답까지 써내라는 시험이었다. 자문자답自問自答이라, 이렇게 쉬운 시험이 있을까. 처음엔 그렇게들 생각했을 것이다. 결과는 의외였다. 답만 쓰는 시험보다 학생들은 더 난감해했다. 출제가 어렵다며 백지로 낸 학생까지 있었다. 친구인 교수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질문도 알아야 하는 법, 질문하는 수준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욕구를 거세당하고 던져주는 먹이에만 익숙해진 애완견은 제가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인간이 침팬지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이유가 야구를 잘해서라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스피드와 제구력을 겸비한 인간의 던지기 실력이 돌이나 창 같은 발사 무기에 효과적으로 작동됨으로써 고단백 고칼로리의 먹을거리를 사양해 몸집과 뇌 용량을 불릴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인류가 오늘과 같은 최상층의 권좌를 누리게 된 데에는 어깨 근육의 발달이 기여한 바 크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어깨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동물이었다는 점에 더 많이 주목해야 한다.

영혼은 언제나 질문 앞에서 깨어난다. 철학도 과학도 질문으로 시작된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뭐 먹고 싶어요?' '어디 가고 싶어요?' 상대의 욕구에 맞추려는 원심력이 상대를 내 쪽으로 끌어들인다. 질문은 가장 좋은 소통법, 질문이 없는 사랑에는 이타성이 없다. '알았어, 알았다고!' 라든가, '그러면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어.'라는 말을 자주 주고받는 커플 사이엔 더 이상의 동력이나 시너지가 없다. 질문에는 방향성이 있다. 최고의 IT 기업인 구글도 전체 임직원이 참여하는 주례週例 질문 시간을 통해 혁신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한다. 기발하거나 얼토당토않은 질문들을 통해 조직이 추구하는 가치를 파악하고 투자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질문이 없는 정치가는 독재자이기 쉽다.

세기의 대국 사건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의학과 회계, 법률적 판단까지,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하는 AI에게 어디까지 내어주고 손을 들어야 할지, 예측불허의 미래가 불안하다. 기계란 태생적으로 인간 능력의 확장을 위해 생겨난 존재라고, 기술을 탑재한 인간은 더 강화될 것이라고, 애써 낙관을 해보긴 하지만 정해진 규칙과 알고리즘, 예측 가능한 답만으로 인공지능을 능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희망적인 기대라면 인간의 자궁이 아닌 인간의 머리에서 튕겨 나온 녀석들은 문제를 잘 풀지는 몰라도 질문을 만들지는 못할 거라는 예측이다. 문명과 예술의 출처가 그러하듯 질문의 원산지도 인간 여자의 자궁일 터, 따스한 피와 촉촉한 살로 이루어진 유기생명체 안이 아니면 우리가 누구인가,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첨단의 과학기술로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질문들이 발화하고 증식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자궁에서 출시된 존재들조차 연식이 오랠수록 질문하는 법을 잊고 산다는 사실이다.

이제 막 말을 배운 아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거 뭐야?' 아니면 '왜?'라는 물음이다. 생명체의 눈부신 적극성이 질문 안에 녹아 있다. 늙으면 질문이 없어진다. 질문 대신 아무도 묻지 않는 해답들만 스크루지 아저씨의 열쇠 꾸러미처럼 주머니 가득 쩔렁거린다. 별스럽게 묻고 싶은 것이 없고 무엇에도 특별히 끌리지 않고 더 이상 누군가가 궁금하지 않은 나, 진즉 늙음에 포섭당한 것인가?

글쎄…라고, 아직은 아닐 거라고, 방금도 무언가를 묻고 있지 않았냐고, 애써 스스로를 위무해 본다. 그래봤자 누구도 동조해 줄 수 없는, 기껏 자문자답일 뿐이겠지만. 혼자 묻고 혼자 답하며 지도 없는 길을 찾아 헤매는, 어찌 보면 사는 게 다 자문자답 아닐까. 순간순간 밀려드는 회의와 질문에 나름의 해법으로 맞서보지만 끝끝내 오답투성이일밖에 없는, 막막하고 쓸쓸하고 모호한 노정路程, 그것이 우리네 인생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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