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으로 가는 길 / 정혜숙

 

장항으로 간다. 토함산 기슭을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대왕암으로 머리를 돌리다가 장항리 골짜기에서 먼지 묻은 맨발을 씻으라는 듯, 움푹 웅덩이에 세숫물을 받아놓았다.

신성한 제단을 오르는 옛 수도자의 행로를 따라 운동화 끈을 풀고 찬물에 발을 들여놓았다. 순간, 때 절은 세상 시름이 가슴을 파헤치고 머리를 훑고 달아난다. 싸늘하게 식은 가슴을 일으켜 다시 돌다리를 넘어 산을 오른다. 개미집 틈을 비집고 금장초 무리들이 엎드려 길을 연다. 가을 철새들이 분주하게 비행을 떠나는 오후, 절터는 적막하여 코끝이 시리다.

길이 길이었을까. 턱에 닿을 만큼 숨을 몰아쉬며 오른 뒤에 맛보는 기운은 가슴팍을 서늘하게 한다. 천고를 떠나는 생각들을 거머쥐려는 듯 바람은 이곳에서만은 몸을 몹시 사린다. 흙 발로 디귿자 열린 길을 오르면 몸이 떠난 흔적을 고스란히 안은 산자락이 정좌하고 있는 게 맨 먼저 들어온다.

두어 걸음 딛고 선 발 아래로 몸을 굴려 바스러지는 활엽수 낙엽들은 보이지 않는다. 면벽참선 하는 엄숙(嚴肅)을 깨지 않으려는 듯 멀찌감치 피해 앉은 나무들은 온통 절하는 소나무들뿐이다. 솔잎들은 조용하다.

우렁이 각시 같은 소제를 한 동자승이라도 있었을까. 절터는 솜씨 좋은 재단사의 손끝에서 마름질된 것처럼 사방팔방 한눈에 들어오게 잘려 있다.

숨을 수 없는 고요가 흐른다. 사람들이 첫발로 떠나 쓸쓸함이 엄습하고 혼자 남은 집에 지금으로 팔순 해 앞, 폭음을 동반한 전쟁-도벌꾼이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림-이 일었다. 삼국을 통일했던 장수의 위엄은 어디로 갔을까. 불꽃들이 파시시 파시시 산을 태우고 산을 닮은 것들을 앗아갔다. 화마가 짓밟고 난 뒤 삼백예순날 발을 접질린 풀꽃들의 세상으로 변한 이곳을 화상흉터만이 서까래를 무겁게 지탱하던 옛날을 기억하고 있다.

집이 무너지고 경주박물관으로 몸을 옮기신 부처님의 거룩하신 섬섬옥수를 잠식한 열꽃은 참한 열매를 달지 못하고 부처님의 몸에 초록 주름이 되어 자글자글 맺혀 있다. 사지가 잘리고도 온화한 미소로 중생들을 감복시키시던 기억 한 자락을 빠르게 바람이 데려왔다.

장항으로부터 시작된 천 길 낭떠러지보다 더 까마득한 깊이로 다가오는 시간의 뒤꼍에는 연꽃으로 피지 못한 염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헤어져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본향에 남겨진 탑에다 붉은 꽃잎보다 더한 그리움의 배를 띄웠나 보다. 건들바람이 실어 온 비린내가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한나절 족히 걸어야 다다를 수 있는 동해, 배를 띄우는 신라인들의 그림자가 해거름을 등에 업고 자박자박 걸어오는 듯하다.

절터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제 이름을 모른다. 다만 두 기의 탑이 그곳 집을 지킨 터주로 남아 있었다. 장항 오층 석탑의 마른 몸은 박물관에서 뵈었던 부처님의 몸처럼 검버섯을 피우지 않았다. 우주를 포함한 탑의 몸에 장항리 볕살이 저 혼자 공덕을 쌓았나. 게으름 피우지 않고 탑을 씻긴 공덕의 얼굴이 말갛기만 하다.

신라인의 번화가 다시 수레바퀴를 돌린다. 지금은 물을 건너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닿을 수 있지만 맨 걸음으로 일평생 살던 신라인들에게는 계곡길은 고난이 되질 않았으리라. 부끄럽게도 타인의 걸음을 빌려 살아온 나를 뒤돌아보게 한다.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무모하리만치 내게 안겨진 그릇을 박차고 살아온 마흔 해가 붉은 주둥이를 연 목어처럼 뱃속을 헤집고 소리를 내질렀다. 깊은 우물 벽을 울리는 울음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게 안긴다.

표의(表衣) 자락 펄럭이며 탑돌이 하던 선남선녀들의 기원이 몸을 깎은 촛불로 흐르고, 탑골은 여인의 자궁처럼 안온한 수태의 기미가 흐른다. 잉태의 크나큰 은덕에 사뭇 머리가 숙여진다.

쇠로 바위를 깎고 살점이 떨어져 나온 만큼 구부러진 토함산 바람을 선두로 산의 정기와 사람들은 동해를 향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신라의 살아있는 이치들이 모두 바다로 향했듯, 산을 오른 석탑도 고개를 바다 쪽으로 돌리고 있다.

탑의 마음을 알 것만 같다. 세상의 수레바퀴는 한 치의 빈자리도 없이 흙과 자갈에 부대끼면서 둥글게 산다. 누군가 아낌없이, 거저 안겨주는 게 없는 팍팍한 일상은, 눈을 씻고 닦고 보아도 없었던 발을 자주 모난 돌부리에 치이게 했었다. 자각하지 못한 두려움만 늘 내가 가는 길에 도사리고 있다고 원망했는데…….

그 때, 산을 오르고 당도한 무수한 물음의 해답을 말해주듯 쇠개개비 한 마리가 호로롱 붉은 노을을 물고 나무를 옮겨 앉았다. 막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연극배우처럼 쇠개개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배역을 훌륭하게 해낸 것이다. 일순간 머릿속에서 엉킨 인연의 끈이 스르륵 풀린다. 새의 무게만큼 고요가 흔들리고 다시 울림 뒤에 작은 깨달음을 일깨워주는 적막이 흐른다.

千古를 지나 길은 흐르고 있다. 찬란한 흐름을, 몸신 받는 무녀처럼 내림을 받고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오물을 밟고도 아무런 자각도 없이 살아온 과거가 소르르 한기를 안고 살갗에 돋으며 마음을 장항에 내려놓는다.

탑은 안주하고 싶었을 것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뒤엉켜 살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가슴에 뻐근하게 치밀어 오는 묵직한 것들이 오래도록 내 몸에 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장항리 절터, 즈믄 해를 살아 오늘도 호흡을 놓질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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