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한 고민 / 전오영

바람이 분다. 쇼윈도 너머, 허름한 행색의 할머니 한 분이 유모차를 밀며 오다 서다를 반복한다. 힘겹게 허리를 펴더니 손잡이에 몸을 의지한 채 한동안 서 있다. 유모차의 바구니 안에는 몇 가지의 곡식들이 삼월의 햇살과 함께 담겨져 있는 듯하다.

이내 무게에 짓눌린 유모차의 바퀴가 천천히 시장 골목을 끌어온다. 신발가게 안에 있는 나와 할머니의 눈이 마주친다. 가까이서 본 할머니는 이빨이 없는지 주름진 턱을 연신 합죽거린다.

“어떤 신발을 찾으세요?” 쇼윈도 너머 할머니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내게 신발가게 주인이 묻는다. 유모차에 생을 의지한 채 서 있는 할머니에게서 눈을 뗀다.

기숙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실습시간에 신을 안전화를 사야 한다며 문자를 보내왔었는데 잊고 지내다가 오늘에야 시장 안 가게에 들른 참이다. 인터넷 쇼핑몰은 배송 시간 때문에 늦을 것 같아 시장에 들른 것인데 시장의 굽은 길을 끄는 할머니의 걸음에 자꾸만 눈이 간다.

가게 주인에게 안전화를 찾아달라는 말을 하고 다시 시선은 유리창 너머를 향한다. 할머니는 길가 노점 옆에 유모차를 세우고 정성스럽게 곡물을 내려놓는다. 손관절염이라도 앓고 있는 지 콩이며 참깨를 내려놓는 손이 뻣뻣하다.

할머니의 등허리에도 서리태 위에도 내려앉은 햇살을 헤집으며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다가간다. 할머니가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 같은데 손사래를 치며 그냥 지나간다. 깔고 앉은 찬바람 위에 할머니의 머쓱한 표정이 얹힌다. 시기적으로 참깨와 콩은 늦여름에서 가을까지가 성수기이거늘 저 할머니의 곡물은 계절을 잊은 듯하다.

노상에 놓인 할머니의 곱은 시간이 팔리길 기다리고 있지만 쉬이 팔릴 것 같지 않다. 한참 동안을 앉아 있던 할머니가 주섬주섬 곡식을 다시 유모차에 싣는다. 나는 신발값을 계산하면서도 팔순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할머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문득 수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참깨를 타작하는 어머니를 도와드리던 날이었다. 경험이 없는 나는 세게 두드리면 빨리 털어질까 싶어 힘을 주어 깻단을 두드렸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는 차분한 어조로 살다보면 힘주어 해야 할 일이 있고 살살 다루어야 할 일이 있다며 깨가 멍석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게 터는 법을 알려주었다. 더하여 작은 것이 모여 고소함을 이루는 이치를 들려주셨다.

할머니가 느린 동작으로 유모차를 신발집 앞에 세우고 문을 민다. 곡물을 팔아달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신발집 주인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친다. 신발가게 주인의 짜증을 못들은 척 가게 안으로 들어온 할머니가 반쯤 접힌 허리를 힘들게 세우더니 덥석 내 손을 잡아 밖으로 끈다. 뭉툭한 손이 어머니 같았다.

밖으로 나온 할머니는 유모차 안에 있는 참깨와 서리태를 보여주었다. 당신이 농사지은 것이라며 싸게 줄 테니 모두 가져가라 한다. 마침 밥에 넣어먹을 서리태가 필요해서 한 됫박 남짓을 샀다. 돈을 지불하기도 전에 할머니는 애원하듯이 참깨도 마저 팔아달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나는 할머니의 곱은 목소리를 차마 떨치지 못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참기름을 짜서 구리에 사는 동생네와 나누어 먹을 요량으로 3킬로그램 정도의 참깨를 모두 샀다. 그때서야 할머니는 유모차를 가볍게 밀며 시장 골목을 빠져나갔다.

서둘러 인근 기름집에 들어갔다. 국산 참깨라는 말에 한 방울이라도 지키려 기름이 병에 담겨지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던 기름집 주인은 다른 볼일 있으면 보고 오라며 밖으로 밀어냈다. 그럴수록 나는 국산 참기름과 중국산 참기름을 바꿔치기한다는 동네 어른들의 말을 떠올리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문득 기름집 주인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참깨, 어디서 샀수?”

길 건너 할머니가 농사지은 것을 샀다며 나는 기를 세웠다. 그런 내 위세를 조롱이라도 하 듯 주인은 중국산이라며 입을 삐쭉거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닐 거라는 내 말을 한 번 더 숨죽이려는 듯 중국산이 아니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기름집 주인의 말에 은근 화가 났다. 국산이라며 믿고 사라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중국산 참깨라니. 서리태마저 의심스러웠다. 원망스러운 마음을 누르며 참기름에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중국산과 국산의 가름을 알 턱이 없는 나로서는 난감했다. 어쨌거나 병 속으로 떨어지는 참기름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참깨에서 고소한 맛이 나면 그만인 것을, 중국산이면 어떻고 국산이면 어떠랴. 나는 살아오며 출처에 상관없는 참깨처럼 고소한 맛을 낸 적이 있었던가. 어찌 보면 중국산 참깨만도 못한 나일 것인데 그 출생을 탓해 무엇 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