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초(花草) / 이효석



가을 양기(陽氣)는 지나쳐 센 모양인지, 뜰의 화초가 벌써 조금씩 시들어 가는 것이 안타깝다. 비 뒤이면 그렇게도 무성해서, 가위를 들고 군 잎을 속닥속닥 잘라내지 않으면 안되던 것이, 지금엔 잘라 낼 여유는커녕 제물에 시들어지고 없어져 간다.

그 쇠해 가는 양을 볼 때, 더욱 귀엽고 사랑스럽다. 화초도 어느 시절보다도 가을에 한층 아름다운 모양이다. 마치 나뭇잎이 우거졌을 때보다도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질 때가 가장 아름답듯이.......

그다지도 찬란하던 살비파가 하루아침에 눈에 띄리만큼 홀쭉하게 잎이 시들어 올라가고, 꽃 이삭이(흡사 들깨같이 이삭에 꽃이 송이송이 달린다) 아래에서부터 누렇게 말라 갔다. 봉숭아는 씨만이 튀어져 날고, 프록스도 잡초 속에 녹아버린 듯이 자태가 없어졌다. 프리무라와 카카리아는 어지간히 목숨이 질겨, 여름철에 다른 꽃들과 함께 우거지기 시작한 것이 맨 나중까지 지금까지 여전히 차례차례로 봉오리가 피어난다. 이 꽃들이 있는 까닭에 뜰은 아직도 화려한 맛을 잃지 않고 있다.

또 한가지 정정한 것에 부용(芙溶)이 있다. 북경(北京)에서 얻어 온 진종(珍種)이라고 해서, 동무가 봄에 두 포기 나누어 준 것이 여름 동안에 활짝 자라나면서 지금엔 키가 나보다 더 크다. 빛은 담황색이나, 흡사 촉규화 같은 모습에 꽃도 하루 꼭 한 송이씩 차례차례로 날마다 피어 올라간다. 그 한 송이의 생명은 꼭 하루 동안이다.

아침에 활짝 퍼진 함박 같은 송이는 저녁 무렵이면 벌써 오므라져서 추잡한 꼴을 보이게 된다. 한 송이 한 송이의 명맥은 짧다고 해도 그런 송이가 한 대중에 무수히 준비되어 있는 까닭에, 결국 그 한 포기 전체의 목숨은 긴 셈이다. 아직도 남은 봉오리가 많다.

첫 서리나 와서 하단의 판이 폴싹 주저앉게나 될 때에야 부용은 완전히 시들어 버릴 것이다. 목숨이 긴 것이 꽃의 흠이 아니라, 장점의 하나라고 볼 수밖에는 없다. 지나쳐 단명한 꽃은 어처구니없고 가엾기 때문이다.

장미의 진짜 생명은 한 시간이라고들 한다. 즉, 꽃이 피어서 질 동안까지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단 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 한 시간이 지나면, 벌써 향기도 없어지고 빛깔도 변해져서, 지상미의 절정은 지났다는 것이다. 그때는 벌써 꽃이 아닌 것이며, 형해(形骸)만을 남겼을 뿐이지, 진미는 지났다는 것이다. 미의 시간이 얼마나 엄격하고 어처구니 없고 애달픔이랴? 비단 장미뿐이랴. 모든 꽃이 그러할 것이다. 비단 꽃뿐이랴, 사람의 미 또한 그러할 것이다. 비단 사람뿐이랴, 지상의 모든 것이 역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보라! 청춘의 사랑이 꼭 한 시간에 끝나는 것이라면 이 얼마나 두렵고 안타까운 일인고?

고래의 시인으로서 미의 멸망을 탄식하고 원망하지 않은 이 한 사람이나 있으랴? 꽃이 왜 금시 시들고, 구름이 왜 금시 꺼지고, 무지개가 왜 금시 사라지며, 사람이 왜 젊음을 잃으며 영감(靈感)이 왜 쉽사리 달아나나 애달프게 탄식한 나머지 조물주에게 물으니, 「나는 멸할 숙명을 가진 자를 미로 작정했노라」고 주는 시인에게 대답하지 않았던가? 미는 본연적으로 멸망의 숙명을 지고 온 것이다. 탄식한들 기도한들 어찌 그를 막아내는 재주 있으랴?

요행히 장미의 한 시간의 미를 참으로 옳게 바라보고 찾아내고 감상할 수 있음은, 장미 재배에 수 십 년의 조예(造詣)를 닦은 전문가라는 것이다. 그 밖의 사람은 그 한 시간을 오산하고 피어 있는 동안의 장미는 어느 때나 일반으로 아름답거니 하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피어서부터 시들 때까지를 다 같이 한 눈으로 감상하고 즐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 누구나 모두가 단 한시간만을 본다면 나머지 시간은 얼마나 삭막(索莫)한 것이 되랴?

나도 어쩌다 전문가가 안되고, 그 밖의 축 속의 한 사람이 된 것을 그지없이 행복스럽게 여긴다. 장미뿐이 아니라 무슨 꽃이든지 간에 시들어 버릴 때까지 공들여 바라보려는 것이다. 한 시간을 보고 버리기는 너무도 아깝다. 꽃뿐이랴, 여인이나 정물이나 세상의 모든 것의 미를 때때의 변화를 샅샅이 들쳐 내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참으로 미를 사랑하는 터가 될 터이므로.......♥ essay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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